명상
명상하지 않을 때 보는 비전이야말로 진정한 명상이다

여러분 모두가 명상 중 보는 것에 집착해 그것만을 체험이라 여기고, 평소 명상하지 않을 때 보는 비전은 계산에 넣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상인데 말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가 선(禪)"이니까요.

명상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자신을 강제로 조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의 에고로 명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명상은 정말 자연스러워야지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볼 때처럼 그렇게 이완된 마음으로 명상한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른 명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장작을 패다가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깨달은 스승의 한마디에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바로 이런 것입니다.

어째서 여러분은 몇 시간씩 골머리를 앓으며 앉아 있는데도 체험이 없는 걸까요? 그것은 에고, 두뇌로 명상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집중하고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신경이 곤두서게 되어 아무런 체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명상이 아니라 연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행주좌와 모든 것이 명상이어야 진정한 명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은 자는 동안 에나 나에게 완전히 집중해 바라볼 때 좋은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명상입니다. 완전히 집중했기 때문이지요. 나를 보거나 내 말을 듣게 되면, 기쁜 나머지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계속 집중하는데, 그것이 명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정상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미간을 찡그리고 "나는 명상하고 싶어. 어째서 체험이 없는 거지? 왜 여태 체험이 없는 거야? 언제 오려나?"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닦달하고 깨달음의 체험을 재촉하는 것입니다. (대중 웃음)

하지만 부처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는 오고 감이 자유롭습니다. 여래(如來)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여래처럼 행하고 여래처럼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금강경에서도 "머무는 바가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승을 볼 때, 일심불란하게 볼 수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체험도 다 생기지요. 어떤 사람은 내가 강연하는 곳이 밝게 빛나는 세계로 변하는 것을 보기도 하는데, 그것이 정말 극락세계입니다. "극락이 바로 우리 앞에 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바세계지만 우리가 마음을 모아 집중하면 그 모든 곳이 일시에 극락세계가 되며, 마(魔) 또한 부처로 보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단체 명상에 참여한 후 체험이 나빠졌다고 내게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사실 그것은 여러분의 에고가 발현하고 여러분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 동수들이 여러분에게 나쁜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탓할 게 아니라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해 주길 기대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볼 때 머리 속에 아주 많은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보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러려면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온갖 것들을 생각합니다. 오불을 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며 마치 나를 어서 보내고 싶어 하는 듯 합니다. (대중 웃음)

나를 보면서도 오불 외우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거기서 나는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건 나를 어서 쫓아 보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볼 때는 마치 오랫동안 부모를 보지 못했던 아이처럼 갈망하는 마음으로 보아야만 체험이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체험이라 할 수 있지요.

두 눈을 꼭 감고 미간을 찡그리며 앉는 것이 명상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연습에 불과한 것으로 신실함을 드러내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일 뿐입니다. 가끔은 신실할 때 체험이 있을 때도 있지만, 집중할 수 없을 때도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고 맙니다. "괜찮아! 내가 신실하든 안 하든 지금으로선 이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신이시여, 제발 도와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마치 먹고 싶지 않아도 먹는 것처럼 그것이 자신의 의무인 양 명상합니다. 습관을 기르듯이 아침에 일어나 별일이 없으면 우선 신을 생각하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다시 신을 생각합니다. 매일 너무나 바빠서 신실하게 신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일찍 일어나 신을 생각하고 저녁에 귀가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때 신을 완전하게 생각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며, 일할 때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깨달은 스승의 강연을 듣는 것은 최대의 축복이며 공덕입니다. 그때 우리는 두세 시간 동안 계속 스승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스승의 자장에 의해 고양되거나 그 스승의 빛에 의해 우리의 나쁜 업장이 씻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체험을 하게 되지요. 여러분이 나를 보러 와도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강연에 왔을 때만큼 큰 가피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두세 시간 동안 계속 깨달은 스승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찰나간 보는 것도 대단한데 하물며 두세 시간 동안 보는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어떤 세계의 중생들은 여지껏 한번도 깨달은 스승을 보거나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스승을 접할 기회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살아 있는 스승을 두세 시간 동안 볼 기회가 있다면,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입문여부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 강연에서 깨달음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앉아 있는 것만이 명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할 때 그것이 명상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일할 때 체험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때로 명상 중에 아무런 체험도 없으면 좌절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그건 우리가 에고로써 명상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명상이 아니기에 체험도 없는 거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공덕이 있으니까요. 신실하게 명상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과가 좋고 나쁘고는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분이 명상할 때 왜 내면의 체험이 없는지 말해 주겠습니다. 그 순간 집착을 완전히 벗어 버리지 못하고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집중하고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얼굴을 찡그리며 "왜 아직도 화신 스승님이 나타나지 않지?" 하고 생각합니다.

신실함과 갈망은 집착과 다릅니다. 그러나 갓 수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이를 구별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저 매일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일부러 명상을 하며 스승을 생각하기만 한다면 그 시간은 여러분의 공덕이 되는 셈입니다. 명상이 좋고 나쁘고, 혹은 잡념이 있었든 없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앉아있는 시간들은 그대로 기록되어 위로 올라갈 핑계가 될 것입니다. (대중 박수)

한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러분이 옷가게에서 고용되어 일한다면 때로 손님이 없을 때는 앉아서 졸기도 합니다. 그래도 주인은 그 날 임금을 지불합니다. 또 하루 종일 바쁜 날 역시 임금은 똑같이 계산합니다. 가게에 일하러 오기만 하면 그에 대한 월급을 받는 것이지요. 명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체험과 관계없이 여러분은 명상을 해야 합니다. 매일 명상한 시간만큼 기록되어 언젠가 나는 여러분에게 그에 대해 '값'을 '지불'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천국에 갈 "비행기 표"를 살 수 있습니다. (대중 박수)

칭하이 무상사/ 1988. 8. 12-18. 포모사 이란 선칠 MP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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