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길목에서
진리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에고의 벽을 뛰어넘어 진리와 다시 하나가 될 때만이 비로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완벽해질 것이다.

무상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것은 실로 경전에 적힌 바와, 스승님의 말씀하신 바 그대로이다. “매순간 우리는 내면과 외면으로 배우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항상 내면으로 집중할 수 없어 이 귀중한 가르침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스승님께서 매일 내가 정진하도록 이끌어 주신 데 대해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후회감과 부끄러움도 느꼈다. 여태까지 실패를 해왔지만 나는 계속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지혜안에 집중하는 것을 알고 난 후 나는 나의 진아를 깨달았으며 어떤 깊은 이해력과 느낌들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몇 마디 하는 것이 나에게는 몇 십 킬로그램의 바위를 옮기는 것처럼 힘들고 무척 피곤했다. 때로 내 입은 완전히 비협조적이어서 꼭 다물어 버렸다. 말을 해야 할 때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억지로 대답을 해야 할 때 횡설수설하게 되고 내 자신도 피곤하고 듣는 사람도 아주 불편해 하며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원래 내면에 집중된 주의력을 갑자기 다른 사람의 화제 쪽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스승님께서 강연을 하고 우리와 대화를 나누실 때 스승님께서는 얼마나 큰 차이를 겪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스승님은 아주 쉽게 이것을 해내신다. 얼마나 큰 사랑과 자비인가! 이것이야말로 구고구난의 고귀한 사명이 아니겠는가! 스승님의 사랑은 우주만큼 거대하다. 스승님에 비한다면 내가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는가. 단지 스승님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정진 또 정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 관계로 동수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아주 이완되고 내 자신과 말하는 것처럼 아주 쉽다. 한마디 말로써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말로도 이것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는 없지만 이런 동수들과 이러한 때, 우리는 한마디 말로써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대화 혹은 ‘교류’는 아주 순조롭고 쉽다.

또한 스승님과 인연 있는 사람들과 말할 때도 아주 재미있다. 내 입은 저절로 막힘없이 말하게 되며 심지어 내 두뇌도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때의 적절한 비유나 재치 있고 생동감 있는 예 또한 신기할 정도이다. 그러나 이때 에고가 나오면 그 순간 영감은 사라지고 머릿속은 멍해진다. 그러면 듣는 사람도 고개를 저을 뿐이다. 내가 계속 말한다면 서로 모순되고 듣는 사람 또한 반박할 수 있다. 그때 나는 당황하게 되고 횡설수설하게 된다. 결국 내 자신 또한 감히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교훈을 몇 차례 배운 후 나는 에고가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상의 힘의 가피력이 없다면 이 에고를 극복하기란 정말 어렵다. 더욱이 무상의 힘과 교통하는 법을 전해주는 스승이 없다면 우리 자신이 ‘에고가 없다.’ 혹은 ‘무아의 봉사를 한다.’고 생각하게 되어 다른 사람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쉽게 속이게 될 것이다. 사실 이때 우리의 에고가 가장 커진다. 스승님은 가끔 몇 시간씩 혹은 저녁 내내 강연을 하신다. 하지만 재치가 넘치고 막힘이 없으시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와 순수, 에고 없는 불보살로부터 나온 강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또한 신이다. 그러나 신처럼 행동할 때는 아주 드물고 잠깐이다. 단지 몇 분, 몇 초간이다. 그때 우리의 에고가 나오고 신을 가리게 된다. 마치 두꺼운 벽이 우주와 개인의 작은 방을 분리시키듯이. 그때 우리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작은 방에 앉아 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의 신비를 얼핏이라도 보기 힘들다. 우리가 에고의 벽을 뛰어넘어 진리와 다시 하나가 될 때만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완벽해질 것이다.

- 뉴스잡지 6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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