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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성경이야기] 파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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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얘기하는 것을 듣기 좋아했습니다. 예수는 종종 짧은 얘기로 대중에게 진리를 설명하곤 했습니다. 다음 얘기는 그 중 하나입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있었는데 옥수수를 재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가 씨앗을 뿌릴 때 어떤 씨앗은 길 옆에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그 씨앗을 쪼아 먹었습니다. 어떤 씨앗은 돌이 많은 곳에 떨어져 태양이 떠올랐을 때 바싹 말라 버렸지요. 또 어떤 씨앗들은 가시나무 틈새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들이 돋아나면서 씨앗들을 압박했기 때문에 크게 자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씨앗들은 토질이 좋고 기름진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점차 옥수수 줄기로 자라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이야기가 신의 가르침에 대한 은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신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어떤 사악한 사람들은 신의 가르침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도록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르침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얼마 후에 역경과 고난이 닥치면 신념을 잃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처음 들을 때는 믿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는 일상생활 속의 고민거리나 남편, 아내, 가족의 감정이 신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그 때문에 걱정거리로 압박을 받거나 감정에 묶여 있을 때 신의 가르침을 잊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토질이 좋고 기름진 땅에 뿌려진 옥수수 씨앗과 같습니다. 그들은 신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듣고 이해하며, 그들이 이해한 가르침을 계발하고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가를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생활을 살펴보면 그들이 명상을 하는지 안 하는지, 계율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깨달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해서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승을 따라 입문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사람만이 퇴심합니다. 내가 뿌린 것은 무엇이든 잘 자라납니다. 그들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길 옆에 떨어져서 새들에게 먹히거나, 돌이 많은 곳에 떨어져서 자랄 수 없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약간의 사람들만이 천천히 자라고 있지만 자라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과 모두 웃음) 여러분은 키 큰 사형 사저들에게 가려져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아직도 비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웃들은 모두 나보다 키가 크다. (스승님과 모두 웃음)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나중에 와서 키가 나보다 작으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행복해 하면서 천천히 자라고 있지요.

그렇지만 너무 천천히 자라는 사람들은 내게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 줍니다. 내가 그들에게 물을 아무리 많이 줘도 크게 자라나지 못하고, 그래서 나에게 문제를 일으키지요. 때때로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질려서 그들에게 물 주는 걸 중단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당신 스스로 자라나도록 해요.” (스승님 웃음) 여러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돌이 많은 곳에 떨어지거나, 길 옆에 떨어져서 새들에게 쪼아 먹히거나, 햇볕에 바싹 말라 버린 씨앗과 같아서 자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의 가르침을 듣고 우리의 재가자와 출가자들은 때때로 곧바로 이해합니다. 그들의 영혼은 이해하며 두뇌도 홀연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들의 부주의나 무지 때문에 새싹은 바람에 떨어지거나 해가 뜰 때 시들게 됩니다. 세상의 번뇌와 모든 괴로움은 태양과 바람과 비와 같은 역경입니다. 충분히 강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자랄 수도 없고 고난을 헤쳐 나갈 수도 없습니다.

때때로 나는 어떤 사람들이 마음을 아주 빠르게 바꾸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랍니다. 오늘 그들은 매우 신념에 차 있고 열정적이고,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그들은 마치 바늘에 찔려서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푸푸푸’거릴 뿐입니다. 풍선이 조그만 바늘에 찔려도 ‘피피피’ 소리를 내면서 아주 조그맣게 됩니다. 풍선은 원래 크게 보입니다. 그러나 내부가 비어 있기 때문에 바늘에 찔리면 ‘피피피’ 소리를 내면서 사라집니다. 반면에 큰 빵 조각은 바늘에 찔려도 영향받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큰 것에 대해서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일에 착수하기 전에 말부터 늘어놓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자신은 이런저런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장애물을 만나자마자 곧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피피피’거릴 뿐이지요. 이와 같은 일들이 때때로 나를 놀라게 합니다.

왜 이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세세생생 너무 많은 인상을 축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좋은 씨앗보다 나쁜 씨앗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얘기와 똑같습니다. 어떤 씨앗들은 가시나무 틈새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질식을 당해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싹을 조금 틔운다 하더라도 가시와 경쟁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죽습니다.

우리 재가자와 출가자 혹은 내게 와서 입문하고 나를 따라 배우는 사람들 모두 나는 똑같이 대접하고 똑같은 것을 줍니다. 마치 똑같은 노력과 기대를 가지고 씨앗을 뿌리는 농부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앗들은 자라지만 어떤 씨앗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농부에 관한 또 다른 얘기가 있습니다. 이 농부는 땅을 경작해서 밀을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농부의 적이 그의 일을 망쳤습니다. 농부와 그의 가족들이 잠든 어느 날 밤 적은 농부의 땅에 가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잡초 씨앗을 뿌렸습니다. 잡초가 싹이 터서 자라기 시작하자 하인들이 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잡초를 제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농부가 말했습니다. “안 된다. 너희들은 어떤 것이 잡초이고 어떤 것이 밀인지 구분할 수 없다. 너희들이 두 개 다 뽑아 버릴까봐 걱정된다.” 그리고 나서 말했죠. “그냥 놔둬라. 두 개 다 자란 후 적당한 시기에 잡초를 뽑고 밀을 수확할 것이다.”

예수가 이 얘기를 끝마친 후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의 가까운 제자가 물었습니다. “이 얘기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스승님 웃음)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가장 잘’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게 ‘현명한’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이 얘기를 이해하고 집에 갔는데 말입니다. (스승님과 청중들 웃음)

예수 그리스도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 농부이니라. 그리고 내가 경작하는 밭은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좋은 씨앗은 신에 속해 있으면서 신과 나를 믿는 사람이다. 잡초는 신의 적에 속해 있는, 부정적인 힘과 사탄의 힘이니라. 그러나 수확의 시기는 마침내 올 것이다. 두 개의 씨앗이 함께 자라는 동안 서로 섞여 있어서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모두 자랐을 때 우리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느니라.”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입문자들이나 수행자들도 막 수행을 시작했을 때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수행의 중대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신심이 적으며 하루 동안은 스승을 믿지만 사흘 동안은 믿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의 옥수수 씨앗과 세 개의 잡초 씨앗이 섞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루는 스승을 따르고 사흘은 세상을 따릅니다.

오늘은 출가자가 되기를 원하면서 나를 따르지만 내일은 집에 가서 결혼하고 싶어하거나 부모와 아들과 다른 사랑스러운 빚쟁이 등등의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내면에서 격렬하게 발버둥칩니다.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설득하려 합니다. “저는 스승님을 믿습니다. 스승님은 성인이십니다. 하지만 저는 떠나겠습니다. (스승님 웃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습니다. 저의 생각이 맞으며 인생을 어떻게 돌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모두 그런 식입니다. 그렇지만 얼마 후 그들은 후회하며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떠나고 또다시 돌아오겠지요. 많은 시간을 낭비하면서요. 그렇지만 얼마 동안 몸부림친 후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수행을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매우 안정될 것이며 그때는 번개조차도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타이난에서 발행된 잡지를 읽어 보면, 우리와 같이 입문하지는 않았지만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에 관해서 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생에 수행을 했고 이번 생에서도 다른 법문을 수행하여 어느 정도 체험이 있지요. 그들의 체험이 궁극적인 것이냐 아니냐는 관계없이 어느 정도 체험을 합니다. 성심이 있으면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 책을 볼 때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강연을 듣기 위해 왔을 때 많은 불보살이 내려와서 무대 위의 내 법회 장소에 있는 것을 보았지요.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는 입문을 한 사람과 입문을 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입문한 사람은 모두 밝은 색이나 어두운 색, 여러 가지 다른 색깔의 빛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지요. (스승님과 청중 웃음)

여러분 왜 웃지요? 입문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빛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에게도 빛이 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갈색이나 검은 색깔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중들 웃음) 그런데 우리 입문자들만이 각기 다른 밝기의 빛과 진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문하지 않은 어떤 사람은 전혀 빛이 없습니다. 이것은 입문하지 않은 사람이 말한 것이며, 타이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보통 사람과 다를 게 없지만 무형의 빛과 무형의 힘은 정말로 다릅니다! 나는 여러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제 치터를 연주한 어울락 사람은 거대한 전류와 같은 강력한 힘을 느끼기 때문에 내 옆에 가까이 앉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그렇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전류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펑후에 수행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보통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그는 매우 거만했습니다. 그는 결코 아무에게도 입문하지 않았고 어떤 강연도 듣지 않았지요. 내가 그곳에 갔을 때 그는 나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었고 나의 빛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빛을 좋아했고 나의 강연을 들으러 왔지요.

어느 날 그가 내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힘은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까닭을 물었죠. 그가 말했어요. “스승님 주위에 구름 낀 것처럼 흐린 것이 있습니다. 제가 스승님 가까이 가면 그것이 저를 죽일 것처럼 느껴지고 압박감을 느낍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어요. “당신에게 악의가 없다면 아무 문제 없어요. 그것은 당신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형의 힘은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진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지요. 진동력이 비슷하다면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동물과 함께 앉아 있을 때는 무엇을 느낍니까? 예를 들면 염소와 돼지, 소, 닭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혼자서 앉아 있는 걸 상상할 수 있겠어요? 다른 냄새와 분위기를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수행자들이 관음법문을 진정으로 오랫동안 수행하면 우리는 큰 에고를 갖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등급이 더욱 높아졌을 때 우리의 에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에고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끼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아 보이지만 점차적으로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해하거나 증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우리가 진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명상을 해서 높은 등급에 이르렀을 때 우리에게는 신·구·의조차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에고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박수)

수행을 하면 할수록 에고는 점점 줄어듭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얻는 것은 적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것도 얻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랑스럽게 느낄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편안해지며, 수행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짐은 점점 줄어듭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말이 점점 줄어듭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합니다. 반면에 수행을 많이 하는 사람은 말을 적게 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지혜가 있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안전합니다. 게다가 이 방법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간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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