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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스승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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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167.gif 스승은 중생의 무지로 인해 고통받는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저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그저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 "너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만으로 그쳐선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고나선 사람들이 고통받을 때 "괜찮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아플 때는 나도 아픕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 동안 여러분이 겪는 모든 것들을 나 역시도 겪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저 즐겁기만 할 것입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게 "당신이 수술을 받을 때, 육체를 떠나 천국으로 가서 즐긴 후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텐데요." 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즐기기만 한다면 여러분과 고통을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통을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나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스승이 되는 것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승이 되면 제자일 때, 무지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이 즐길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을 갈망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신에 더 가까와집니다. 여러분이 스승의 경지에 더 근접할수록 스승의 지위를 잘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스승의 지위는 희생을 뜻합니다. 즐거움이 아닙니다.

예, 여러분은 즐거움도 갖습니다. 그것은 아주 확고한 기쁨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혼란스런 상황에도 영향받지 않아요.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고통받고 또 고통받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을 덜 갈구해야 합니다. 신을 잊고, 스승을 잊고, 이 세상을 좀더 즐겨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용광로이자 힘의 근원으로부터 조금 멀어지고, 희생양의 위치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심하게 고통받지 않으며 더 많이 즐길 수 있습니다.

마치 주방의 요리사와 같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요리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가 즐기는 것처럼 즐기기를 원한다면 그는 요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주방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 모든 사람이 즐기도록 요리를 해야만 합니다. 스승도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 스승을 매우 사랑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나나 어떤 스승을 개인적으로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진리를 매우 사랑하고 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스승, 스승의 힘과 자질에 아주 가까워집니다. 그때가 즐기지 않는 때입니다. 이렇게 말해서 안 됐습니다. 매우 역설적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부지불식간에 이 모든 희생을 원하지 않고, 천국의 저택이나 천국의 지혜의 빛과 온갖 찬란한 것들을 더욱 원한다면, 여러분은 그리 많이 갈망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당신이 깨달음을 더 많이 원할수록 얻는 것은 적다." 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망으로 스스로를 가로막기 때문이라고요. 그러나 논리적인 설명은, 여러분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너무 원해서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그것을 아주 열망한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고 여러분 자신이 됩니다. 여러분이 완전히 뭔가에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그 품성을 반드시 지니게 됩니다. 그토록 신을 갈망한다는 것은, 성인과 같은 사람이기에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fl-167.gif 스승은 이 세상을 즐기지 않는다 master_blonde.jpg

자, 여러분이 성인이고 일종의 스승의 영혼이라면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즐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면의 영혼은 세상 사람들의 무지, 절망, 암울한 경험에서 오는 고통을 떠맡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난 전처럼 즐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즐기고 있고, 나는 요리사입니다. 항상 주방에서 요리를 하지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여러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요리하는 동안은 여러분을 볼 수 조차 없습니다. 스승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신을 갈망할수록 덜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르게 얘기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으니 미안합니다. 여러분이 절반만 바란다면 절반을 얻게 되겠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면 많이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에게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즐거움보다 고통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스승들이 이 세상을 결코 즐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즐기려고 오는 것이 아니니 그것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즐기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또 다시 와서 무지한 사람이 되어 다시 즐겨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미 수학이나 영어 교수인데 교실에 앉아 교육을 받고 봉사받고 선생님에게서 또 다시 사랑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학생 때와 같이 똑같은 관심을 얻으려면 또 다시 학생이 되는 수 밖에 없지요. 대다수 사람들은 학창시절이 지난 후에야 그 때를 즐기지 못한 것을 후회합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모두들 학생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그 시절을 즐기지 못하지요. 우리는 지금 당장 교수가 되고 싶어합니다. 엊저녁에 되었으면 더 좋았겠지요. (웃음)

교수나 선생님이 되면 "학생일 때가 더 좋았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걱정도 없고 모든 것이 쉽고 활기찹니다. 어떤 책임도 없으며, 여기저기 파티에나 가고, 도처에는 여자, 남자 친구들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정말 쉽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미 교수가 되었으니까요. 여러분이 옷을 벗고 직위를 버리고 학생들과 다시 앉게 된다고 해도 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되겠지요. "왜 그럴까?" 여러분은 "나는 왜 저 애처럼 즐기지 못할까? 다른 학생들은 다 즐기는데, 어째서 나는?"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즐거운 시절을 이미 지나왔기에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는 거지요.

fl-167.gif 깨달음의 세 단계

그래서 여러분은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좀더 즐길 수 있는 초보자인지, 아직 수행의 초보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즐기는 이 단계를 이미 벗어났는지 자각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깨달음의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무지의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수행하길 좋아하지 않고 물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두번째 단계는 깨달은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빛을 보고, 신을 보고, 천상의 저택을 보고, 사마디에서 모든 것을 보고, 이런 법열을 즐깁니다. 세번째 단계는 그러한 것들을 초월합니다.

마치 학교생활과 같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대학에 입학하지 않은 단계입니다. 여러분은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고등학교 중퇴자이거나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이지요. 그 후 여러분이 대학에 입학해서 어떤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두번째 단계입니다. 세번째 단계는 여러분이 졸업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등급이 다 다릅니다. 그저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단계입니다. 한번에 여러분이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미 교수인데 학생생활을 하고 싶다는 그런 터무니 없는 것도 요구하지 마십시오. 나이도 다르고 정신 연령도 다르니까요.

여러분이 스승인 내게 부탁한다면 내가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예, 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지요? 여러분이 천국을 원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요? 우리는 천국으로 도망가는 대신에,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을 때, 자연스럽게 천국을 경험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항상 그것을 소망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한 겁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만일 신이 여러분에게 그것을 주지 않는다면 굳이 요구할 건 없습니다. 아마도 신이 그리 관대하지 못한가 보지요. 그렇다면 그건 신의 잘못이지요. 만일 여러분을 못 보고 지나치는 그런 실수를 하는 창조주라면, 더군다나 우리가 그를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fl-167.gif 사심없는 봉사

나는 지금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저 24시간 내내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나는 여기 있는 여러분 모두를 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아무리 섬광처럼 빠르게 둘러본다 해도요. 나는 내 시간을 여러분에게 봉사하는 데 전부 사용하므로 이 모든 천국의 신호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비젼조차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여전히 나를 스승으로 존경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의 비젼 때문은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런 비젼도 없습니다. 그것은 나의 사랑,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주기만 합니다. 신에게서나 여러분에게서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심없이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이 올 겁니다. 여러분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주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신의 왕국을 구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질 것이다" 란 말을 항상 들어 왔을테니까요. 그러나 신의 왕국이란 무엇인가요? 신의 왕국은 여러분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의 왕국을 가지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거기에 가지 않을 겁니다. 나는 모든 사람을 기다릴 겁니다. 전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고통받고, 상처받고, 기어가고 있는데 나 혼자, 아니면 몇몇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앉아 신의 왕국을 즐긴다면 뭐가 좋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의 왕국이 실현된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깨달은 후에야 신의 왕국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계속해서 그 길을 간다면 어떤 비젼이 주는 것보다 더한 만족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벗어나지 말고 계속 그 길을 가십시오. 그 일을 하십시오. 사람들에게 봉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비젼보다, 어떤 빛이나 부처를 보는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항상 손님이 되지 말고 요리사가 되도록 하세요. 물론 가끔은 손님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이전에 항상 손님이었고, 손님으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손님 이상의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여러분은 늘 요리를 하기 때문에 가끔 식당에 가면 손님으로서 이런 저런 것들을 상상하지요. 그러나 손님은 단지 거기에서 먹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지불하고 나서 그냥 집으로 갑니다. 뭐 대단할 게 없습니다.

fl-167.gif 진정한 수행법은 부드럽고 우아하다

master_florida5.jpg우리가 영적인 비젼을 가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므로 비젼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평범한 것입니다. 전기쇼크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주 매끄럽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영적인 세계로의 전환은 매우매우 부드럽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분이 유체이탈이라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육신을 벗어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수행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여러분이 거기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방식으로 자아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거기에 있는 동안은 더 이상 에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난 첫번째 단계야. 이제 두번째, 세번째야. 난 성인이고, 3등급 혹은 3학년이야" 라고 알게 되겠지요. 그건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말해주지요. 우리는 이미 우리가 늘 원하던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고 있고, 어느 등급에 도달해 있는지 아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필요하겠지요. 그를 수행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다 그런 것은 아니며, 항상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처음 법대를 졸업했을 때는 대단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법학박사로 졸업한 것을 축하하고 싶어서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파티를 열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 후에는 자신이 법률가인지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때때로 사람들이 물으면 기억하겠지요. 그러나 어떤 교만함도 없고, 의기양양하지도 않고, 어떤 행복감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저 자신이 법률가일 뿐이니까요. 새로울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xml:namespace prefix = o />

fl-167.gif 비었을 때 충만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중 어떤 이들은 영적인 희열에 매우 익숙해져서 숨쉬는 것처럼 느낍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늘 자리에 앉아 불국토를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국토에 있지 않기에 불국토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와 불국토가 둘인 것이지요. 스승의 지위에 가까워질 때 우리는 또 다시 무지해집니다. 이것은 삶의 역설입니다. 그래서 노자의 도덕경에서 "지혜로운 자는 무지한 바보와도 같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시 되돌아간 것처럼 됩니다.

같지 않습니다. 예전엔 무지했었고, 지금은 진정한 의미에서 진실로 무지한 것입니다. 전에는 무지했지만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으로 무지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때가 지혜로운 때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비어 있을 때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가 여러분의 것이지요. 여러분이 온갖 쓰레기로 가득차 있을 때, 여러분은 밖에 있게 됩니다. 이 말은 여러분 모두와 무형의 존재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전에는 이따금 나 또한 그런 기분을 느꼈었지요.

스승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소위 비젼들과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로 가득한 지식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적절한 시간과, 그 순간 내가 꼭 알아야 할 것들만 압니다. 그 뿐이에요. 그것이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모든 지혜를 끌고 다니며 자신이 스승이라는 걸 만인에게 과시하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뉴스잡지 74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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