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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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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그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사막으로 향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시나이 산기슭에 정착했습니다. 하루는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이곳으로 데려왔느니라. 나는 너희를 줄곧 보호하였으며 너희에게 좋은 음식을 풍성히 베풀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백성이기 때문이니라! 나는 너희가 나의 각별한 친구가 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나의 말에 복종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일제히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틀 후에 시나이 산에서 모든 백성들 앞에 나타나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몸과 의복을 깨끗이 했습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보러 오실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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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각별한 친구가 되려면 십계명을 지켜라

그날이 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천둥소리를 듣고 빛을 보고 시나이 산위에 걸린 두꺼운 구름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율했습니다. 하느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하느님을 뵈었을 때 떨리지 않았습니까?

물론 아직 만난 적이 없으니 떨리지도 않았겠지요. (웃음) 그렇지만 성경에는 그들이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그것들은 내면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우리 모두 이런 체험이 있지요. 하느님의 친구였던 모세와 아론이 시나이 산을 올랐을 때, 하느님은 그들에게 '십계명'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자신의 백성들이 십계명을 지켜야만 하느님의 각별한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지요.

하느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이다. 너희는 나만을 섬기고 숭배해야 하느니라. 너희는 다른 어떤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거기에 절을 하지도 말지어다. 너희는 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성심을 다해야 하느니라. 또한 너희는 주일을 지켜 쉬어야 하느니라. (이것의 의미는 명상임)" 원래는 여섯 번째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하였기에 안식일이 일요일로 옮겨졌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토요일을 그들의 특별한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날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독경을 한다든지, 신의 이름을 외운다든지, 명상을 한다든지, 아니면 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교회에 모이는 등, 오직 신을 위한 일만을 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 세속적인 일을 멈춘다는 의미지요!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와서 신의 말씀을 공부하고 신의 일을 함께하며, 신을 섬기기 위해 명상하고 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며, 신이 바라는 바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오자마자 바람마저도 잠잠해졌습니다. (스승님과 청중들 함께 웃으며 박수) 여러분이 잠시 동안 명상한 후에는 폭풍우까지도 멈추었습니다. 원래는 비가 억수로 오게 되어 있었지요! 이것은 신이 아주 기뻐한다는 표시입니다! (스승님과 청중들 웃음)

십계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존경할 것, 다른 중생들을 해치지 말 것, 배우자에게 충실할 것, 간음하지 말 것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또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것과 똑같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거나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면 한 포기의 들풀조차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굳이 계율을 범했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의 명예와 신사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에 해를 입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감옥에 넣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인간에게는 자존심이 생명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시비를 가리거나 우리에게 계율을 어겼다고 말해 주길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 내면의 스승, 내면의 신이 우리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나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제로 우리 자신을 위해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방금 여러분에게 읽어 준 것은 하느님이 만든 '십계명'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 계율들을 어떻게 다양한 실생활에 적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셨으며, 그가 이를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상황이 변하면 계율도 그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계율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예를 들어 한 사람이 굶어 죽어간다고 합시다. 그와 그의 아내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부모까지도 다 죽어갑니다. 그랬을 때 만약 그가 가족을 먹이기 위해 밖에 나가 빵을 훔쳤다면 그것은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내게서 빵을 훔쳤다고 가정한다면 솔직히 말해 나는 그를 고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그에게 빵을 좀더 주겠습니다. 그의 행동은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가 훔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살아갈 만큼 충분히 가졌거나 사람들이 우리를 충분히 돌봐 주고 있는데도 우리가 여전히 더욱 안락하고 아름답고 영광된 것을 원한다면, 이 경우에는 비록 우리가 풀 한 포기를 훔쳤다 해도 도둑질이 됩니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계율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며 의도와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내가 전에 여러분에게 다른 사람의 공양이나 선물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아픈데 돈이 없거나 아무도 돈을 주지 않을 때 내가 여러분에게 얼마의 돈을 준다고 하는데도 여러분이 이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웃음) 그때는 진정으로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을 탐하는 것이 아니지요. 반면에 돈이 필요 없을 때는 설사 동전 한 푼을 받더라도 아주 무거운 죄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경우에는 얼마를 받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율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계율이 그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되었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물론 계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다른 사람한테 피해가 간다면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만 할 것입니다. 또 때로 다른 사람이 우리를 해치려고 하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만일 다른 사람에게 살해된 경우에는 그들을 증오하거나 우리의 목숨을 지키려고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를 생사의 틀에서 좀더 일찍 해탈하도록 도왔으니 그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스승님 웃음) 그때는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불, 그리고 모든 시대의 참 스승들은 다른 이들이 그들을 해칠 때, 보통 사람들이 하듯이 그렇게 자신을 지키려고 저항하지 않았던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좋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잘 대해 주지 않을 경우에는 복수를 하거나 살해할 마음을 품습니다. 우리 수행자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을 신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없지요.


그때 모세는 사람들에게 십계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의 계율을 존중하고 따를 것을 맹세했지요. 그런 후 모세는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느님이 십계명을 큰 석판에 새겨 주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걸 받으러 산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 당시 오랫동안 삼매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단지 십계명을 받으려고만 산에 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잠을 자는 동안 십계를 연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명상을 하다 피곤하면 쉬고 그런 다음 또다시 명상을 했겠지요. 그는 은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하느님이 새겨 주신 십계명을 받기 전에, 그것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대 지혜를 얻으려고 먼저 자기 스스로가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자기 자신을 정화시키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기서 오랫동안 명상하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40일간이나 나타나지 않자, 산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화를 내며 동요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믿음은 약해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러쿵저러쿵했습니다. "원! 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그가 여태 돌아오지 않는지 모르겠군." 그들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을 원하고 다른 스승을 원합니다. 모세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리로 데려왔으니 그가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그는 사라져 버렸으니 우리에겐 다른 스승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빨리 찾아봅시다. 어때요?" (스승님이 웃으며 말씀하심. "그들은 속달로 스승을 주문했어요!")

아론은 다소 멍청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 동의하고는 그들에게 보석과 금을 모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황금을 녹여 그것으로 송아지를 빚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여러분의 새 스승입니다"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제단을 지어 황금 송아지를 그 위에 올려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절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전에 있었던 일을 까맣게 잊은 채 "아! 우리를 애굽에서 이곳으로 이끄시어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시킨 우리의 스승은 바로 이 황금 송아지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계속해서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황금 신상을 숭배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한껏 즐겼습니다.

이처럼 짧은 시기에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했던 약속을 깨고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그가 격노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이 화를 내셨는지 안 내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화를 내셨다고 해도 그를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모세 또한 산을 내려와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황금 신상을 숭배하는 것을 보았을 때 화가 났습니다. 그 당시 그의 분노는 너무도 격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계율을 새긴 석판을 집어 던져 산산조각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황금 신상을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버렸지요.

모세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어찌 이처럼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너무나 어리석고 무지하구나!" 그는 계속해서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단순히 이렇게 말로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굉장히 혼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지 한두 문장으로만 기술되어 있군요.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을 너무도 사랑하였기에 이렇게 그들을 책망한 후에는 다시 무지한 그들을 용서해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분노를 거두시고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셔서 그들이 다시 선량해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또한 아주 참을성이 많으십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또다시 십계명을 써 주셨습니다. 이번에 모세가 십계명을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었을 때는 사람들의 행동이 발랐습니다. 그들은 춤추고 노래하거나, 다른 황금 신상을 만들어 스승으로 삼거나, 다른 신을 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겸손해져서 모세가 신의 계율인 십계명을 상세히 설명해 줄 때 무척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하나의 성약이 맺어졌고 모든 이들이 아주 즐거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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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여러분의 요청도 있고 하니 십계명에 대해 좀더 설명해 주겠습니다. 첫번째 계율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입니다. 불교신자들도 비슷한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이런 서약을 받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불,법,승에 귀의합니다. 나는 다른 작은 신들과 천인들, 귀신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의미상으로는 같은 거예요!

부처를 따르는 것은 최고의 등급, 즉 최상의 깨달음과 최상의 신의 등급입니다. 고귀한 가르침은 부처에게서 나옵니다. 부처가 말한 고귀한 가르침만이 진정한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승단 또한 스승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됩니다. 승단에 속한 사람들은 부처님의 자녀 혹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최고의 중생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낮은 차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물론 좋지 않습니다. 친구를 사귀려면 최고로 훌륭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가장 덕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최고로 훌륭한 대통령을 원하지만, 다소 열등한 사람을 뽑아서 좋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물론 우리한테 나쁜 결과가 돌아옵니다. 이와 유사하게 신앙을 가지려면 최상의 신을 섬겨야 합니다. 지신, 수신, 산신, 태양신 같은 작은 신들이나 정령, 마귀를 숭배하는 건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힘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오직 최상의 신만이 무한한 최고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를 최고의 하느님이나 진정한 주님 또는 부처의 힘, 그 무엇으로 여기고 믿든 그가 지고의 존재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여러분은 그가 우주의 최고의 힘이라는 것을 내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지역 신이나 정령한테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에게 해로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그가 독재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진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대통령이 있으니 그를 존경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 우리가 대통령이 아닌 사람이나 대통령 후보에게 대통령으로서의 대우를 해줘야 합니까? 어떤 사람이 "내가 대통령이다. 나는 대통령이 되길 원한다"라고 주장할지라도 그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한 것만으로 우리가 그를 대통령으로 존경해야만 한다면 그것이 타당한 일일까요?

그에 대한 우리의 정치적 견해나 느낌이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되는데 그에게 국정을 맡겨 보십시오. 당장에 우리의 실수임이 명백해질 겁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최고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지지하는 편이 낫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대통령이 우리에게 "나는 나라의 원수인 대통령이다. 다른 대통령의 말은 듣지 마라. 오직 내 말만 들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정당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자신만을 섬기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내면의 스승이자 최고의 힘입니다. 그는 모세의 시대가 오기 전까지 여러 생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돌봐 왔습니다. 이는 그들의 조상들이 관음법문을 수행했으며 그 힘이 엄청나게 컸기 때문입니다! 수세대가 지났음에도 하느님은 그들의 자손들을 여전히 돌보았지요.

그는 그들을 너무도 세심하게 돌보았으므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고 말할 권리가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를 잘 보살피는 내면의 스승, 하느님을 만났을 때, 마땅히 그만을 숭배하고 다른 존재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것이 자기를 섬기는 백성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를 숭배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 나아졌습니다. 그의 권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말했던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자녀를 둔 사람은 갖은 방법을 써서 늘 자녀들을 돌봅니다. 자녀들은 학업을 포함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과 충분한 의복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건강까지 돌봅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이 이웃 사람들을 부모로 여긴다면 뭔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웃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으며 동전 한 푼, 옷 한 벌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자녀들을 사랑하지도, 돌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단지 외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마음대로 아무나 부모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진짜 부모만이 그들의 부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이 우리에게 "너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를 부모로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거만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사람, 내일은 저 사람 하는 식으로 항상 이웃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우리의 부모로 섬긴다면 우리의 건강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되고요?

그때는 진짜 부모도 우리를 돌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들 곁에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하느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신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섬기고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좋아지지요. 이것이 그의 의도입니다.

때로 스승도 우리에게 자신을 믿으며 어떤 상황에서든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말고 자신에게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를 찾아간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고 스승이 우리를 돌볼 기회마저 잃어 버리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너희는 나를 믿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믿지 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에게 질투심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온 우주가 그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다른 사람과 경쟁하며 시기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부모의 자식인 것처럼 우리는 본래 그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믿든 믿지 않든 그는 잃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는 지위를 놓고 다른 이와 다툴 필요가 없지요. 자명하니까요! 그러나 어떤 자녀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알아보지 못하고 힘겨운 삶을 삽니다. 이는 그들한테 좋지 않아요.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유산을 물려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자녀들이 곁에 없다면 부모가 어떻게 그들을 돌보겠습니까? 자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데요. 그러므로 이것은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니고 자녀들을 위한 것입니다. (박수)

스승을 따를 때 우리는 스승이 내적, 외적으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돌볼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 뜻을 쉽게 이해하지요. 그를 믿으면 믿을수록 그가 우리를 돌볼 기회가 많아집니다. 그는 단지 우리를 이롭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만일 우리가 무지하다면 우리는 자신들이 그에게 속해 있지 않으므로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우리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무감각한 아이들일 뿐이지요.

때로 아이들은 부모가 엄격하게 대하면 골이 나서 부모가 자기들을 사랑하지도 않고 잘 돌봐 주지도 않는다고 여기고 달아나 버립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부모는 자식들이 잘되라고 엄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들이 자녀들과 관계가 있으며, 그들을 사랑하기에 보살피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이 잘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를 원망하며 도망가거나, 이상한 짓들을 해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럴 땐 부모들이 자녀들을 보살피기가 힘들지요

신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도 비슷합니다. 신은 자녀인 우리들을 돌봐야 할 책임이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해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고서 우리 자신에게 권리가 있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엉망이 됩니다. 우리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어려움이 있지요.

마치 지혜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아무런 능력도 없는 어린아이가 자신을 스스로 돌보려는 것과 같습니다. 엉망으로 하고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그는 자신이 더 망가지고 가족과 멀어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을 더 위태롭게 하고 어렵게 만들며 부모들을 걱정시킬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를 믿어야만 합니다. 그가 우리의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우리의 혈육입니다. 그를 거절하고 나무 불상이나 산, 귀신이나 정령 등을 숭배한다면 우리는 갈수록 혼란해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그를 버리고 믿지 않으며 그에게 우리를 돌볼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의 본성을 찾도록 하기 위해 명상을 가르칩니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하느님과 지혜를 알고 그로 하여금 여러분을 이끌게 하여 여러분의 삶을 더 밝고 안락한 삶으로 만들게 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외부의 신상이나 불상 등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쓸모없습니다! 부처는 우리 마음속에 있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면에서 그를 찾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밖으로 구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박수)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듯싶군요.

자, 하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 그는 옳았습니다! 우상이 아니라 '나', 즉 내면의 지혜를 숭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옳았습니다! 사람들을 위협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그는 진정 가장 위대한 지고의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의 숭배나 존경을 필요로 하지 않지요. 그를 인정하고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복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신실한 기도 때문에 그가 우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좋다! 너희가 위로받길 원하고, 좋은 기분을 갖길 원하며, 좀더 현명해지고 편안해지길 바란다면 나를 믿고 나만을 숭배하라. 그러면 좋아지리라."

하느님은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말할 뿐입니다. 진실 이외에 무엇을 여러분의 자녀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예의로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좋다! 너희는 이웃집에 가서 그들을 너희의 부모로 섬길 수 있다." 그렇게 여러분의 자녀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여러분의 말대로 한다면 돈도 먹을 것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타락하고 힘든 삶을 살 것이고, 아무도 여러분의 자녀를 자식으로 대하며 돌보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의 자식은 돌보지 않습니다. 아기일 때 옷과 음식을 얻을지는 모르지만, 가족간의 애정과 부모의 사랑을 느끼며 편안한 생활을 하지는 못할 겁니다. 인간은 음식과 의복뿐 아니라 부모의 사랑도 필요로 합니다. 부모와 떨어져 이웃사람들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때로 우둔하게 자라지요.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모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자식이다. 집을 떠나면 고생할 것이다. 안락하게 잘 지내고 싶다면 그저 우리를 믿어라. 우리가 너를 돌봐 줄 것이다.' 부모들이 이런 말을 하면서 예의를 차리거나 난처해 할 필요가 있을까요? 거만한 마음 없이 진실을 말할 때는 쩔쩔매서는 안 됩니다.

때로 내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여러분은 내가 난처해 할 거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속인다면 아마도 난처함과 두려움을 느끼겠지요.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교사라든지 의사, 사업가처럼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길게 속일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진실만을 말합니다.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든 안 믿든괜찮습니다. 나는 난처해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바르게 대하려면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할 때만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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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을 숭배한다면 신에게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

이미 두 번째 계율에 관한 설명이 된 것 같군요. 두 번째 계율은 바로 이렇습니다. "너희는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며 거기에 절을 하지도 말지어다." 왜 하느님은 각별히 이러한 것들에 신경을 썼을까요? 그 이유는 인간들이 일할 능력과 지능과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한 조각의 나무나 돌덩이를 숭배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하면서 자신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하지요.

국부 손문 선생은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국부로 존경할 만합니다. 그는 나무 불상을 부수며 왜 이것을 가지고 부처라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중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함) 나는 그가 위대했다고 생각해요. 지혜가 있는 사람은 강한 영도력이 있습니다. 그가 성공했고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를 질투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보타산에 올랐을 때 관음보살을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그가 신심이 있고 순수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가 가톨릭 신상에만 집착하고 있었다면 오직 예수만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도 관음보살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분별심이 없고 그가 진정으로 깨끗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관음보살 또한 그를 냉대하지 않았던 거지요.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는 단지 당신에게 내 모습을 보이려고 나타난 것뿐이에요." 이로써 그가 아주 순수하고 정말 훌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는 전쟁에도 참가했으므로 사람을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상황에 맞게 계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내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군인이라서 국법에 따라 혹은 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적을 무찔러야만 한다면 그것은 범죄가 아닙니다. 심지어 백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해도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계율을 어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증오 때문이라면 약간의 상처만 입혀도 무거운 업장을 짓게 됩니다. 살생 의도 때문이지요. 그러나 군인은 다릅니다. 그렇게 하도록 강요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은 계율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당시의 상황과 자신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는 얼마나 자주 또는 심하게 계율을 어겼는지와 자신의 도덕이 어떠한지로 자신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때로 보통 사람들이 다른 이를 평가하기란 상당히 어렵지요. 우리는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데 있어 아주 신중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언제나 잘못 판단할 겁니다.

어떤 사람이 살생하는 걸 보면 우리는 "저런! 저 사람은 못됐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기부금을 내거나 사원이나 병원을 짓는 걸 보면 "오! 저 사람은 아주 훌륭한 걸!" 하고 말하지요.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그의 돈이 어디서 나왔으며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는 유명해지길 원하거나 기부를 함으로써 다른 것을 얻으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런 공덕이 없지요.

우리가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우리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고치기 어렵다는 걸 말해 줍니다. 즉 우리에게 지혜도 없고 판단 능력도 없으며, 그러한 우상이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 신상을 숭배하는 것은 아무 나무나 숭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나무를 갖다 놓고 숭배하면 조각을 하고 칠을 하는 데 들이는 노력과 경비나마 절약할 수 있겠죠.

우상 숭배는 우리가 선악을 판단할 줄도 모르고 성경이나 불교 경전에서 '부처는 우리 마음속에 있다'라거나 '하느님은 우리 안에 있다'라고 말한 것을 이해하지도 못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경전과 스승들의 가르침, 하느님의 말씀과 성인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우리는 거기서 너무나 벗어나 있으며, 너무나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우상에 절을 할 때는 우리에게 남아 있던 한 줌의 지혜마저도 달아나 버립니다.

인도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한 스승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내면으로 스승을 뵙고 너무나 기뻤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녀는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었습니다. 사람들이 산과 강으로 순례를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언젠가 그녀는 스승에게 기도를 한 후에 병에 걸렸는데 쉽게 낫지를 않았습니다. 아마도 스승이 그녀의 업장을 씻어 주기 위해 고의로 병에 걸리게 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녀는 스승이 도와주질 않았다고 그를 비난했어요.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도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가 보면 큰 신, 작은 신, 중간 신, 뚱뚱한 신, 날씬한 신 등 모든 종류의 신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그러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 잠시 동안 화현하는 것을 보았지요. 그러나 그녀가 우상에게 절을 하자 그녀의 스승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스승님이 방금 전에도 거기에 계셨는데 절을 하고 나니 사라지셨어." 그녀는 슬픔에 잠겨 여러 날을 이 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스승에게 왜 갑자기 자기한테서 떠났는지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먹지도 않고 명상을 했습니다. (그녀는 또다시 스승을 탓했습니다.) 그녀의 신실함에 감동한 그녀의 스승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무 우상을 숭배할 때 너는 나를 그들보다도 천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설 곳을 잃었다. 너무 낮고 천하여 거기에 있을 수가 없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가 '인간'이라고 불릴까요? 우리가 동물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악과 높고 낮음, 품위와 천박함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다르지요. 그들은 훈련받은 대로됩니다. 호랑이마저도 훈련을 받으면 서커스에서 고양이처럼 순하게 행동합니다. 사자와 코끼리 또한 감히 저항하지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 훈련을 받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물이 다소 어리석으며 쉽게 독립심을 잃는다고 할 수 있지요.

인간은 이와 같지 않아요. 감옥에 갇혔을 때조차도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억압을 받으면 저항합니다. 자신이 잘못되면 스스로 바로잡습니다. 인간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지혜가 기만당하고 혼동되어서 우리가 다른 신상들을 숭배하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로 비참해지고 하느님의 품에서 벗어나 멀리 방랑하게 될 것입니다! 불경에는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어요. '부처는 마음속에 있다. 너희는 유형의 빛과 소리를 통해 부처를 감지할 수 없다.' 유형의 형상을 숭배하느니 차라리 집에 가서 부모를 숭배하는 쪽이 공덕이 더 큽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숭배하고 싶으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숭배하세요. 그들은 살아 있는 하느님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무 조각상을 쪼개 보면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여러분의 부모는 비록 무지하고 자신의 본성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내면에 신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나무 조각상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나무로 된 뭔가를 숭배하고 싶다면 차라리 살아 있는 나무를 숭배하세요. 적어도 거기에는 약간이나마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으니까요. 하느님의 힘 없이는 아무것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죽은 나무나 아주 낮은 차원의 물질적 형상을 숭배한다면 물론 우리의 지혜와 등급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타락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각별히 신중함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들고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는 너무도 자비로워서 우리가 내면에 있는 미약한 지혜나마 지켜 간직하길 바랍니다. 만일 우상 숭배를 계속한다면 우리는 끝장날 거예요! 우리의 미약한 지혜는 발전될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친구나 수행자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의 지혜는 더욱 밝게 빛나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들에게 오염되고 타락되어 등급이 더욱 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이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에 빠지길 원치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지혜마저 사라지고 말 테니까요.

여러분에게 남아 있는 돈이 아주 적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을 저금한다면 그것으로 빵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속아 그 돈으로 돌을 산다면 여러분은 돈도 잃고 허기로 죽을 지경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 돌까지 날라야 하니 더욱 녹초가 되겠지요. 여러분은 이미 지쳐 있는데 돌까지 날라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이 정도까지 속임을 당할 수 있습니까? 돌을 어떻게 먹을 수 있나요?

그래서 부모는 여러분에게 이 돈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 그 돈으로 돌을 사지 말고 저금을 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돈을 지니고 있으면 잠시 동안은 자신을 지탱하며 살아갈 방법을 생각할 수 있지요. 아마도 여러분은 다시금 기운을 회복했을 때 직업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돈을 돌을 사는 데 써 버린다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허약하고 허기져 있는데 돌까지 날라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금방 죽을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상을 숭배한다면 나아질 방법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재빨리 끌어올리고 여러분에게 최고의 지혜를 나누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치유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가라앉기만 할 겁니다.

어제 여러분은 인도 사람들에 관한 기록 영화를 봤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산과 강으로 순례를 떠나며 얼마나 신실하게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고 신들을 숭배하는지 보았지요. 그렇지만 인도의 인구는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겁니다. 게다가 그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어요. 이는 그들의 신실함이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전에 나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아주 화가 났었습니다. 나는 히말라야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계속해서 꾸짖었지요. (웃음) 혼자 꾸짖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몇몇 출가승들한테 말을 했더니 그들이 나를 꾸짖더군요. (스승님 웃음) 나는 그 신들한테 아주 화가 났어요! 그래서 그들의 면전에서 그들을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물론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못했지요. 단지 난 울화만 터뜨린 거예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그들이 무슨 수로 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그 점을 난 잘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난 정말로 너무너무 화가 났었어요.

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속임을 당하고 많은 수고와 경비, 활력을 낭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절을 하려고 위험도 무릅씁니다. 길이 너무 험해서 집에 살아서 돌아갈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지요. 일부 사람들은 아주 가난합니다. 그들은 여행 경비만을 빌리거나 벌 수 있었기에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갑니다.

공덕을 쌓고 나무 신상을 숭배하기 위해 그들은 머나먼 여행을 합니다. 때로 걸어야 할 때는 갈라진 발바닥에서 피가 나지요. 어떤 이들은 너무나 가난해 신발도 신지 못했어요. 그래서 맨발로 얼음길을 걸어야만 했지요. 그것을 봤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속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주 신실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친구가 없다면 우리의 지혜는 날로 적어져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동물이나 식물, 광물, 광석 등이 될 겁니다. 지혜가 적을수록 지위는 더욱 낮아지지요. 이와는 반대로 지혜가 많을수록 지위는 더욱 높아지겠지요. 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아는 것이 더 많고 더 지성적이라면 여러분은 힘들이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더 잘할 수 있고, 좋은 지위와 보수를 얻을 겁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아는 것이 없고 능력도 없으며 지성적이지도 않다면 천한 일을 하게 되겠지요. 천한 일일수록 더 힘든 반면 보수는 적습니다.

우주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혜를 더 갖출수록 우리는 더 고등한 중생이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혜가 적다면 저급한 중생이 될 거예요. 지혜의 많고 적음이 이 세상에 곤충과 개구리, 가축들, 소, 인간, 신들, 깨달은 존재와 하느님 등 온갖 중생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낮은 차원은 더 고통스러우므로 우리는 내려가는 대신에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 무엇을 두려워해서가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통을 선택하겠습니까? 내가 아까 얘기했듯이 여러분이 다른 이들의 이익을 위해 고통을 선택한다면 찬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여 5대, 6대 자손들까지 고통을 겪게 하는 일은 제발 그만두십시오!

나는 이 어려운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스스로 원해서 여기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도 있고, 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어 그들이 수행의 길을 추구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되기를 내가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원해서 이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라면 좀 다릅니다. 알겠습니까? (박수) 이 세상은 이미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스승님이 고난을 선택했으니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러면 너무 어리석어요! 자신의 고통으로 다른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가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고의로 고통을 찾는다면 자살을 하는 것만큼이나 멍청한 것입니다.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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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자, 이제 세 번째 계율에 대해 말해 봅시다. 그것은 "주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입니다. 하느님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의 이름조차 모른다면 어떻게 그를 존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이름을 모르면 그를 하느님으로, 최고의 스승으로, 무상정등정각 또는 불력(佛力)으로 존경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약하거나 다른 사람을 저주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맹세하는 것조차 좋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속이는 것이라면 벼락을 맞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거나 이와 비슷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서약케 하거나 스스로 신의 이름으로 서약을 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층 더 심합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부녀자와 아이들을 학대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신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예입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대리자를 보냈을 때는 그가 여기에 있을 때나 가고 없을 때나, 늘 그의 이름을 존경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과 스승의 이름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부르거나 조롱하고 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은 우리가 그 자신과 대리자의 이름을 공경하길 바랄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면 할수록 더 큰 축복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많은 생을 통해 태양 빛을 볼 수조차 없는 곳에서 스승들을 만나지도 못할 겁니다. 빛도 없고 아버지의 이름과 스승의 이름을 들을 수도 없는 암흑의 세계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과 대리자, 즉 스승의 이름을 공경하라는 이유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빛을 갖게 되고 내면의 스승은 성장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겁니다. 같은 것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거지요. 하느님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쁜 결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계율이 하느님의 자비심에서 나온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공경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숭배해 오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원토록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합니다. 그는 주기만 할 뿐 받지는 않습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그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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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을 단체명상을 위한 날로 삼아라

다음의 계율은 '일곱째 되는 날에 너희는 어떤 일도 하지 마라'입니다. 안식일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6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왜 휴식이 필요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는 휴식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여러분 또한 내가 휴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매주 일요일이나 휴일에는 여기로 휴가를 와서 나를 지쳐 죽게 만들지요. 이 점에서는 하느님이 나보다 더 운이 좋은 겁니다. (스승님 웃음) 그는 7일째 되는 날에는 쉴 수 있었으니까요.

그는 심지어 우리도 그와 함께 쉬기를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우리가 한 주일 내내 힘들게 일함으로써 우리 자신과 하느님을 기억할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내면의 왕국이고 불성입니다. 그가 뜻한 바는 우리가 7일째 되는 날에는 함께 모여 단체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말고 함께 모여 하느님을 숭배해야 한다고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최상의 지위와 내면의 위대한 지혜를 찾기 위해 영적 수행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는 거지요.

오늘날까지 이 전통은 내려오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람들은 교회에 모여 옛날에 씌인 성경을 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입니다. 약간의 간식도 먹긴 하지요. 그들은 축복이 들어 있지도 않은 과자를 먹습니다. 과거에는 과자가 스승이 주는 축복 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저렴하고 가벼우며 저장하기도 간편하니까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과자는 아주 얇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을 맛으로 먹은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축복 때문에 먹은 것이지요.

우리의 튀밥도 맛은 별로 없지만 다소 저렴해 보입니다. 여러분은 손쉽게 튀밥을 살 수도 있지만 여기에 있는 것을 얻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보통 것과는 다르니까요! 내가 직접 한 사람씩 나누어 주면 더욱 좋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어떤 사람이 밖에서 내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튀밥을 나누어 주는 걸 보면 여러분이 튀밥만을 바라고 여기에 온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그는 아쉬람을 하나 짓고 매일매일 사람들에게 튀밥을 나누어 줄지도 모릅니다.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말입니다. 주는 사람이 힘이 있어야 튀밥에 축복이 깃들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지요.

우리 수행자는 자연적으로 사랑의 힘을 방출하여 다른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떠난 뒤 활력을 잃은 듯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 버렸음을 감지합니다. 내가 코스타리카를 떠날 때 사람들은 아기처럼 울었어요. 그들은 "아! 마치 살을 저미는 것 같고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해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수행자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의 복장 때문도 아니고 삭발을 한 출가승이어서도 아닙니다. 그들이 내뿜는 무형의 자장이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이는 마치 우리가 목마를 때 물을 마시는 것과 같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으며 병들었을 때 효과적인 치료를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아주 편안합니다. 그걸 설명할 수는 없어요.

마찬가지로 축복 과자도 힘있는 사람이 주었을 때만 좋은 겁니다. 그렇지 않고 밖에서 사온 것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들도 유용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요. 집으로 돌아간 다음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지?" 하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를 보려는 갈망을 가질 수도 있지요. 그후 그들은 누군가의 강연을 듣고 "내가 여러분이 신을 찾는 것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럴 경우 그 과자는 유용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상 쓸모없어요. 우리가 함께 모여 온종일 "나는 하느님을 만나길 갈망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암송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에요! 신은 우리 내면에 있지만 우리가 그를 발견하지 않으면 그도 우리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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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다음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아마도 모세 시대에는 자식들이 효성스럽지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런 계율이 필요했겠지요. 모든 이들이 효성스러웠다면 아무도 '불효'라는 걸 몰랐을 겁니다. 모두가 아름답다면 '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요. 이 나라 모든 국민이 부유하다면 아무도 빈곤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예로 이곳은 불교의 나라라서 스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라의 사람들은 한번도 스님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들에 대해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그 당시 사람들은 교육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때를 혼란한 상황이라고 묘사합니다. 모세와 떨어져 있은 지 40일 만에 그들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금 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등급이 낮았고 도덕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승을 40일 만에 바꾸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계속 진보하며 문명화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동굴에 살며 날음식을 먹었었지요. 불도 없고 집도 없고 비행기나 그 어떤 문명 도구도 전혀 없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 외계의 중생들이 이곳에 내려와 현대의 지식을 전해 주고 우리를 더욱 지성적으로 만들고 새 세대들을 더 총명하게 만든 결과, 지금 우리는 좀더 문명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금 나를 따라 수행을 하기에 여러분이 임신한 아기도 다릅니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채식을 해서 포동포동하고 발그레합니다. 아기의 팔을 본 적이 있습니까? 최소한 살이 세네 겹은 될 겁니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영양을 섭취하는지 궁금해요. 그들은 단지 우유만 마시지요! 이 아이들은 분명히 우리보다 더 총명할 거예요. 아마도 엄마 뱃속에서 입문한 아이들은 비범하게 성장할 겁니다. 그 아이들은 특출나고 더 예의바르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행복하며 지혜가 더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자손손 나아지는 것이지요.

모세의 시대를 봅시다. 그때는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아주 낮았지요. 하느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베푸시고 여러 번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면에서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모세가 자리를 비운지 40일 만에 하느님을 저버리고 대신에 금 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그걸 상상할 수 있나요? 현대에도 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적은 숫자지요. 나를 따르는 사람은 퇴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더 확고하고 더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게 더 많은 공덕이 있어서 하느님이 최고의 제자들을 보내셨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보기 전에는 내 말을 믿지 마세요. (스승님과 청중 웃음)

왜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해야만 할까요? 하느님의 사랑이 인과법을 통해, 그리고 육신의 부모와 사랑의 형태로 우리를 돌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신의 사랑이 우리를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명백히 이해해야 합니다! 세세생생 부모의 육신을 빌어 최고의 부모가 우리를 돌보며 기본적인 덕목과 사랑, 자비를 가르쳐 왔습니다.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가 성장할 때 사랑이 뭔지 아는 것이지요. 이건 사실입니다!

우리가 안정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면 우리는 더 사랑을 지니게 되고 더 안정감을 가지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일부의 아이들이 악한 행동을 하고 불량배가 되거나 죄를 지어 기소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을 성급히 비난하지 마세요! 아마도 그들은 어렸을 때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의 교육을 받지 못해서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들의 부모가 일찍 죽었거나 너무 바빠서 그들을 돌보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면 그들의 부모들이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서 어떻게 자식을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을 수도 있지요.

결과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사람들은 점점 덜 사랑하게 되고 점점 더 많은 문제를 만들게 됩니다. 그들은 사회로 나갔을 때 불공평하게 대우받고 억압되어 안정감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후에 오해를 받거나 깡패가 되면 열등감에서 반항하고 사회에 점점 더 저항하게 됩니다. 반항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자신을 잃어 가게 됩니다. 사랑을 잃고 점점 증오심만 키우지요. 그래서 결국 감옥에 갇히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위의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부모가 우리를 잘 대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과보이며 달갑지 않은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과거 생에서 부모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갚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전생에 우리가 나쁜 부모여서 이생에서 나쁜 부모를 만나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내하며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좋은 거예요.

코스타리카에 스물살이 약간 넘은 동수가 있는데요, 입문한 지 이삼 일 후에 울면서 나에게 달려왔더군요! 왜 우느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의 가족, 특히나 아버지와 잘 지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그녀에게 잘 대해 주지 않았지요. 그는 냉정하고 완고했으며,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그녀를 억압하고 지배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지요.

그래서 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사랑을 가두어 놓은 채 아버지한테 쌀쌀맞고 고집스럽게 구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나요? 당신이 그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도 당신의 사랑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그녀는 어리벙벙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에게 나의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오늘 집으로 돌아갈 때 예쁜 장미를 사요. 그런 다음 그 앞에 꿇어앉아 꽃을 드리고 그를 포옹하며 이렇게 말해요. "내가 어리고 철부지여서 내 사랑을 표현한 적도 없고 그래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하지만 그래도 난 아빠를 아주 사랑해요"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녀가 내 말대로 한 결과 그 둘은 서로 껴안고 울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아주 좋아졌지요.

그들 중 한 명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했습니다. 부모들은 밖에서 일합니다. 그래서 종종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치지요. 그들에겐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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