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과 수행 - 질의응답<1>
본문
입문은 여러분 내면의 신과 연결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그후로는 계속 연결을 유지하고 매일 신을 볼 수 있습니다. 필요한 조건은 완전 채식을 할 것, 도덕적인 삶을 살 것, 매일 두 시간 반 명상할 것 등입니다. 바깥에 나가 자세한 사항을 물어봐도 됩니다. 그런 조건들을 적어 놓았으니까요.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여러분 자신이 훈련하는 데 필요한 사항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육식을 하는 삶을 산다면 수행 생활에는 해가 됩니다. 지금 육식을 그만두라고 귀띔해 주는 건 그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요. 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남편이나 부인을 바꿀 필요도 없고, 직업을 바꿔야 할 필요도 없으며, 그 어떤 사회 활동이나 종교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인인 상태로, 유대교 신자라면 그대로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종교, 어떤 종파에 있든 여러분에겐 그대로 있을 자유가 있습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 내면에 있는 최고의 잠재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이른바 여러분이 최고라고 지칭하는, 각 종교에서 최고라고 일컫는 바로 그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상정등정각이라고 하며, 기독교에서도 최고의 힘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힘을 찾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신구의를 청정히 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속으로 폭력적인 그 무엇도 생각해선 안 되며, 사랑과 용서, 인내, 관용을 생각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도 지혜를 얘기하고 사람들을 편안하게 감싸는 말을 해야 합니다. 행동에 있어서는 청정한 삶, 대체로 정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숙한 삶이란 남편이나 부인이 없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의 남편, 부인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혼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남편이나 부인이 어떻든 계속 그것을 견뎌 내십시오. (스승님 웃음) 그것이 정숙한 삶입니다. 그 외 고상한 사람이 되려면 술을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 정신을 흐리게 하고 신체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 말입니다. 정신을 병들게 하는 마약과 술, 도박 등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야 고상한 삶, 청정한 삶이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의 신구의를 신의 고귀함과 신의 뜻에 맞춰야 합니다. 신이 되길 원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면 말입니다. 신이 도박이나 술, 간음 등 온갖 저급한 욕망에 따르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신과 하나가 되고 싶다면, 당연히 우리의 신구의도 그에 맞게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것이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채식을 해야 하며, 신구의를 고상하게 가져야 하고, 자비로워야 하며, 폭력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남을 때리기 좋아했는데 이제 이 명상법을 수행하고 싶다면 더 이상 남을 때리지 마십시오. 이전에 육식을 좋아했다면 이제는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사랑과 자비심의 마음으로 그것을 금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계단 더 높이 올라 신의식 속에 있으며 보다 자비로워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사랑과 자비를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조건입니다. 아주 쉽지요?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 계율이요? 예, 아주 간단합니다. 십계명과 같습니다. 약간 더 짧지요. 첫 번째는 살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채식을 해야 합니다. 채식을 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으니까요. 두 번째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훔치지 말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죽이지 말고 생명을 도우라는 것이며,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고 다른 이에게 진리를 설파하라는 것입니다. 예, 훔치지 말고 자선을 행하라는 거지요. 간음하지 말고 부인이나 남편은 한 사람만 취하십시오. 아니면 출가를 하든가요. (스승님 웃음)
이건 그가 좋아하지 않는군요. 좋아요, 잊어버리세요. 부인은 한 사람으로 족합니다. 일부일처, 이것이 좋지요. 다섯 번째 계율은 술, 도박, 마약 등을 금하는 것입니다. 뭐랄까, 아주 불쌍한 여인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지 말라는 겁니다. 불쌍한 여인들이란 헐벗고 옷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뜻해요. 이것이 다섯 가지 계명입니다. 됐나요? 통역을 들을 때는 웃음이 나오기 어렵군요. 아니면 벌써 웃음이 터졌을 텐데 말이에요.
질문에 답이 있군요. 만일 여러분 스스로 이미 했다면 입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할 수 없었고, 신의 빛과 천국의 소리를 보고 듣지 못했다면 입문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천국으로 가는 많은 단계 외에도 말로 전하는 지시 사항과 피해야 할 많은 함정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때로는 위험할 것입니다.
아니오, 할 수 있어요.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도가 다릅니다. 때로는 깊은 기도 중에 깨달음을 약간 맛볼 때도 있지만, 그것은 깜박거리다가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모르게 되지요! 다시 무지 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입문은 영속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고, 원할 때는 언제라도 다시 스위치를 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의 테두리 속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얻는 깨달음은 꼭 영속적이라곤 할 수 없으며, 때로는 새로 발견한 그 힘을 다루는 법을 몰라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정신 장애가 생기거나 이상한 짓을 하고, 최고의 의식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채 낮은 경지의 신통력을 남용해 마술사나 치료사가 되고 맙니다. 스승의 인도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서 비틀거리다가 온갖 것들과 노닥거리게 되는데, 이는 때로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의 길에도 온갖 속임수와 피해야 할 함정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련한 안내인과 함께 가는 게 더 쉽고 빠르며 더 안전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이렇습니다. 그래서 ‘사바’인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깨달았다면, 우리는 이 지구를 ‘사바’라 하지 않고 ‘천국’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우리 주변 기운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먹을 것을 위해 일할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치 않게 됩니다. 우리의 공덕이 달라져 몇 배, 수천 배가 될 것이므로 천국과 똑같이 모든 것이 생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겨우 수백만 정도만이 깨달아서 그 공덕으로 전 인구를 망라하기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도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주의 역시 이미 상당히 힘을 잃었으며, 제4차 대전, 5차 대전의 위협도 지금은 멀어졌지요. 왜냐하면 현 세기의 대다수 사람들의 자각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대중매체에서 깨달은 스승의 메시지를 전 세계로 내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은 성인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는 덕분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더 나아졌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는 입문을 하면서 여러분의 직업이나 생활 방식, 종교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십시오. 채식만 하면 됩니다. 그뿐입니다.
예. 그럴 수 있습니다. 현재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내면의 스승이기도 한 스승들을 만나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겁니다. 그러나 예수가 살고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스승도 만나고 왕생한 스승 또한 만나거나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우리 제자들이 예수를 보고 부처를 봅니다. 그렇지 않나요? 여기 누구 제자들이 있나요? 맞지요? 예? (동수들: 그렇습니다!) 불교 신자들이 예수나 성모 마리아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기독교인들이 부처나 모하메드를 보기도 합니다.
예, 괜찮습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지요? 예를 들어, 당신의 스승이 이미 당신에게 내면의 빛과 소리를 가르쳐 주어서 그에 만족스럽고 수행도 진보했다면 똑같은 법문을 가르치는 다른 스승에게 입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고 더 많이 갖기를 원한다면, 즉 다른 스승에게 보다 확신이 든다면 물론 그래도 됩니다.
입문시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자신을 보다 높은 경지로 더 빨리 데려다 줄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예전의 스승에게 애착을 느끼고 그를 더욱 신뢰한다면 그에게 남아 있는 편이 좋습니다. 여러분의 스승이 최고라고 믿는다면 바꾸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의심이 있고 내가 말한 빛과 소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면 한번 시도해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빛과 소리야말로 진정한 스승을 가늠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빛이나 소리를 즉시 주지 못한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는 참된 스승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려면 빛과 소리라는 장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다 속 깊이 들어갈 때 산소마스크나 온갖 장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 목적에 맞는 장비들이 있는 법이지요. 그래서 성인들 주위에서 후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건 빛입니다.
만일 당신이 수행의 순수한 목적을 제대로 알고 있고 영원한 해탈을 갖다 줄 법문을 수행하여 진보하고 싶은데 현재의 선생이 그러한 법문을 가르칠 수 없다면, 그때는 물론 참된 법맥을 전해 주고 올바른 길로 적절하게 안내해 줄 수 있는 다른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어떤 믿음의 스승이든 중생을 해탈로 인도할 능력이 없다면 다른 스승을 찾아야 합니다. 참 스승은 여러분에게 정확한 법문을
전하고, 지혜를 열어 주며, 진리를 얻어 신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배의 주된 목적이
우리를 건너편 기슭에 데려다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건너편 기슭에 도달한 후에는 더 이상 그것이 필요치 않지요. 그
배에 집착해서 진짜 목적을 잊어선 안 됩니다.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선생님은 우리가 중학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선생님을 실망시켰다거나 배반했다고 느껴선 안 됩니다.
자신의 가르침과 스승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종교도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나도 입문을 했지만 여전히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경, 불교 등 온갖 종교, 스승들, 심지어 과거의 스승들에 대해서도 얘기합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과거와 현재의 스승들, 그리고 미래의 스승들로부터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얻어 보다 풍요로워졌을 뿐입니다. 여기서 미래의 스승이란 아직 지구에 내려오지 않은 존재로, 여러분이 더 높은 차원에 올라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명상 중에도 미래의 스승을 만나 배울 수 있지요. 그러니 여러분은 아무것도 잃지 않습니다. 얻기만 할 뿐이지요.
입문하지 않고 소위 ‘칭하이 스승’에게 기도한다면, 나는 그녀가 여러분을 도울지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가서 그녀에게 물어보십시오. (스승님 웃음) 아마 도와줄 겁니다. 어쩌면 돕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것은 여러분의 신실함과 업에 달렸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10명이 넘는 스승을 사랑해도 됩니다. 문제없어요. 깨닫기만 하십시오. 그게 이전 스승에게 드리는 최고의 감사 표시입니다. 내게나 그 무엇에도 고마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나는 똑같이 사랑합니다. 아마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당신 자신일 겁니다. ‘난 저것을 정말 못 해냈어. 나는 이것은 제대로 못 했어.’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사랑받는 느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왜 65세 미만인 사람들만 입문할 수 있냐고요? 이 질문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이가 60이나 65세가 넘으면 두뇌가 민첩하지 않지요. 이들은 대부분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채식 때문입니다. 그 나이에 육식에서 채식으로 갑자기 바꾸는 것이 불편을 초래할 수도 있고 채식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까? 예.
내가 나이를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랫동안 채식을 했거나, 몸이 건강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철저하게 두 시간 반 동안 명상할 수 있거나 채식을 할 수 있다면 나도 환영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규정일 따름입니다.
사람이란 너무 늙게 되면 마음이 혼란해집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가르침을 이해할 수도 없고 채식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할 수 있고 마음이 여전히 맑다면 80세가 되어도 환영합니다. 영혼은 영원히 젊습니다. 수행에서 필요한 것은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대로 해낼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마음은 문지기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와 친하지 않으면 그는 여러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입문한 경우에는 6세에 반 입문(半入門)을 하고 12세에 완전 입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입문하지 않았다면 16세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세상에나! (대중 웃음) 어린애가 되어 버렸군요. 내 제자들이 모두 자식들을 버리던가요? 아니면 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라도 했나요? 여러분, 입문한 후에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사랑할 수 있던가요? (청중: “더욱 사랑합니다.”) 아이들을 이전보다 더 사랑한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됐지요? 아이들을 키우세요. 걱정 말아요. 나는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
스승님, 제 다섯 아이들은 이미 입문했지만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누구나 깨달을 수 있습니까?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요? 신실함만이 유일한 기준입니까?
그렇습니다. 신실하면 됩니다. 그러나 너무 늙어서 일정 연령이 지난 사람들의 경우엔 육체와 기억력이 그다지 예민하지 못할 수 있기에 우리는 다음번에, 다음 생에 다시 오라고 말합니다. 아니면 방편법을 수행해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완전 입문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것은 한 사람만을 보증하지요. 입문은 많은 세대를 책임집니다. 그 차이입니다. 입문을 하고 수행을 하면 당신 또한 깨달은 스승이 될 수 있고 많은 영혼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학년에 잠시 동안 유급될 겁니다. (대중 웃음) 학생이 어떤 학년이 됐는데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 학년에 유급하게 되지요. (스승님과 대중 웃음) ‘A’ 대신 ‘J’를 받는 거지요. 그런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여전히 대학생입니다. 어쨌든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은 아닌 거예요. 최소한 여러분이 대학생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단지 점수가 낮은 것뿐이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물질적인 입문은 한 번뿐입니다. 하지만 내면으로는 여러 번 치러지지요. 개개인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입문식 때 스승, 혹은 스승의 대리인은 말로써 똑같은 지시 사항을 전하지만, 입문은 이런 지시 사항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입문은 내면으로부터, 각자의 본성을 깨닫는 데서 이뤄집니다. 그리고 그 등급조차 다르지요.
그러므로 같은 장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 옆에 앉아 있어도 등급이 다릅니다. 또한 그렇기에 스승이 내면에서 각자 다르게 가르치는 것이며, 그건 당사자만이 압니다. 당사자만이 내면으로 스승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며, 그의 체험은 부인이나 아이들, 아버지나 형제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니 원한다면 그것을 여러 번의 입문이라고 해도 되지만, 나는 그것을 각 개인의 배움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의 일은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대중 웃음) 그러므로 여러분은 언제까지나 나의 제자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 제자가 될 필요도 없어요. 여러분은 이미 스승입니다. 단지 그 사실을 모를 뿐이지요.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다시금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사실상 제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건 단지 이 물질 세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르는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치료자가 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치료를 포함한 전부를 알고 싶으면, 전부를 알 때까지 치료하는 것을 잠시 보류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치료할 수 있습니다. 치료함이 없이 치료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병이 낫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무드라를 취하거나 그들의 자장(磁場)을 엉망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어떤 사람을 치료해서 나았다고 그가 내일 아프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완전한 게 아닙니다.
또한 영적 치료사에 의해 치유되면 환자는 자신에게 있는 내면의 치유력을 믿는 대신 그 사람을 믿게 됩니다. 그것은 치료자나 환자 모두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환자는 치료자에게 의지하게 되고, 치료자는 에고가 더 커집니다.
그래서 사람을 치료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치료함이 없이 치료하십시오. 알지 못하는 가운데 치료하십시오.
여러분이 완전히 깨닫고 싶으면 남의 업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영적인 힘을 잃고 물질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배경이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자아와 보다 위대한 영혼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심을 갖게 됩니다. 종교란 일종의 유물로서 옛 스승이 남긴 가르침, 말로 전해진 가르침, 이론적인 가르침일 뿐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로 하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일러 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 침묵 속에서 전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부분이 함께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쪽 가르침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공부합니다. 스승은 그 제자를 계속 가르치며, 제자가 그 자신을 완전히 깨달을 때까지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약속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는 육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이지요. 그러므로 이 몸이 가든 오든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우리 사이엔 아무 거리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얘기했듯이 입문식 때 설명해주는 방법으로 여러분은 살아가는 동안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치 않아 떠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떠나는 경우에도 그 씨앗은 다음 생을 위해 있게 됩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근원에서 왔으므로 가장 위대합니다. 우리는 나무나 바위 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쨌든 입문 과정은 일종의 충격을 가해 우리 스스로 이 최고의 지위를 되찾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로 바쁜 나머지 이것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 왔습니다.
그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다행이기도 하지요. (스승님과 대중 웃음) 하지만 그들이 고의로 해탈을 원치 않는다면 스승이 억지로 그들을 데려가지는 않습니다. 개개인이 다 신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들 각 개인이 모두 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도, 심지어 다른 신이라도 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 자신의 결정이며, 스스로 선택한 그만의 인생입니다. 그는 그런 역할을 하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심판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입문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연결 구멍을 열어서 물이 항상 드나들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컵 속의 물이 바닷물이며 바닷물이 컵 속의 물이 됩니다. 그래요. 매일 명상하는 건 물이 항상 드나들어 컵 속의 물이 썩지 않도록 신선하게 유지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명상이나 명상 수행 경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습니다. 어쨌든 올바른 방법으로 명상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테니까요. 우리는 당신이 A, B, C부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입문 후에는 매일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입문은 당신 인생의 모든 면에 도움을 줍니다. 일을 더 잘하게 된다든가 가족을 더 잘 돌보게 되고, 가족을 보다 사랑하게 되고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며 자신감도 커집니다. 모든 것, 수백만 가지가 나아집니다.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니 여러분 스스로 경험하십시오. 입문은 여러분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명상하면서도 매일 고통을 겪으며 천국을 기다려야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명상을 통해 천국을 지상으로 가져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일부를 즐기고 지상의 삶을 마치면 더 많은 부분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입문은 이른바 가톨릭의 세례, 혹은 불교의 귀의입니다. ‘귀의’ 말입니다. 예. 부처에게 의지하는 거지요.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을 때 예수는 천상의 빛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천상의 하얀 빛이 새처럼 내려왔다고 하지요. 이것이 일종의 입문입니다. 그게 입문입니다. 빛을 보면 깨달은 겁니다. 그것이 입문이에요. 예,
그것은 물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힘으로 일어난 거지요. 아니면 우리는 매일 물 속에서 목욕을 하겠지요. 모두들 물로 목욕을 하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스승은 물을 이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꽃이나 양초, 불을 사용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써만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위대하시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손에 쥘 수도, 잡을 수도 없으며 오직 가질 수만 있을 뿐입니다. 입문식 때 침묵 속에서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스승은 말을 하지 않고 악수를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이렇게(스승님께서 자신의 머리를 만지심)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도움은 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닙니다. 스승이 여러분을 만지면 그 흐름이 강해지긴 하지만, 스승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입문을 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신의 빛을 줄 수 있지요. 알겠습니까?
먼저 그 선생이 자신의 진아를 깨달은 상태여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존재의 차원에서, 다른 의식의 차원에서 자동적으로 행해집니다. 그 말은 선생과 제자의 의식이 연결되고 나면 우리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이뤄진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연인간의 사랑이나 모자간의 사랑은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것은 존재하고 그 당사자들은 서로 잘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깨끗한 물을 담기 위해서는 깨끗한 컵이나 깨끗한 그릇이 필요합니다.
예, 듣는 사람에겐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에겐 도움이 되지 않지요. 좀 전 우리 친구가 자기 아들의 체험을 얘기했었습니다. 스승의 축복은 오직 여러분 한 사람만의 것이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누구와도 나눠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말하면 스승은 가려 버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세계에서 스승 노릇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로서는 신통을 조금 부려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편이 쉽겠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내가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사람들을 고향으로 데려갈 수 없는 그런 스승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결코 자신의 체험과 역량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스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제자들은 입문 때, 그리고 입문 후에 압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매일 스승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때문에 스승의 위대함을 더욱더 알게 됩니다. 기적은 매일 일어납니다. 단지 스승이 공개적으로 그것을 할 수 없을 뿐입니다.
또한 스승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이런 일을 갖고 내세우거나 신통으로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화자찬으로서 스승의 자세로선 걸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스승에게 배우면 여러분 스스로 스승이 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스승의 첫 번째 품성은 겸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제자로 있으면서 겸손해지는 훈련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취에 대해 입을 다무는 법을 배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그것을 도로 가져갈 것입니다. 알겠어요?
3시간 동안 이어서 관음을 할 수 있다면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빨리 통제할 수 있고 잘못된 생각이나 개념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집중이 잘된 상태로 6시간 이상 관광을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3시간 관음을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시간 비율에 따라 명상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명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스승이 지시한 비율을 넘긴 경우, 이를테면 삼매에 들었을 경우엔 괜찮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하십시오. 일부러 관광보다 관음을 더 많이 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때로 진동이 현재의 우리보다 강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거기에 익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지는 순간 우리는 그 진동보다 더 강해집니다.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지요. 마치 오랫동안 굶주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영양 부족인 사람이 갑자기 음식이 많이 생겨 너무 급하게 삼키면 소화불량에 걸릴 수 있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래서 명상을 진지하고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명상하는 데 익숙해지면 수행이 매우 평상적이 되어 자신이 명상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기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을 때 물고기처럼 물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세상으로 나오면 처음으로 피부가 공기와 접촉하게 되어 폐로 호흡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프고 곳곳이 불편해서 큰소리로 우는 것입니다. 울 때도 폐를 사용해야 하니 이 세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지요. 이제는 물이 없으며 공기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에 서서히 익숙해집니다.
우리의 수행도 아기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더 열심히 수행함에 따라 우리는 더 높은 진동에 익숙해집니다. 이러한 진동은 우리 진동보다도 주파수가 훨씬 높기 때문에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 역시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어둡고 막힌 환경에 친숙합니다. 그래서 막 태어날 때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탈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우리가 이 자유로운 해탈의 상태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국에 가서 그것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다시 이 육신의 감옥에 돌아오길 원치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명상하다가 깊은 삼매에 들고 매우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고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갚아야 할 업장과 미완의 의무, 이 세상에서 아직 배워야 할 공부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육신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끌어당겨져 다시 돌아오는 순간 우리는 극심한 좌절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너무나 기분이 나빠서 울기도 하고요.
수행의 여정 중에는 어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업장이 올 때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기가 어머니 자궁에서의 안전한 느낌에 매달려 나오는 것을 거부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그를 위해 좋을까요? 그 환경이 더 친숙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고 따뜻할지라도 그는 거기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자신과 어머니에게 문제만 일으킬 겁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때가 되면 나와야 하지요.
출산 과정 동안 아기는 어머니 몸에서 좁고 뼈가 많은 부분들을 비집고 나와야 합니다. 아주 고통스럽겠지요. 마치 머리로 두 개의 돌문을 비집고 들어가 쪼개고 나오는 것처럼 정말 힘이 듭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때가 되면 자그마한 아기조차 이렇게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원래는 공기도 없고 햇빛도 없으며 물질적인 접촉도 없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물고기처럼 살고 있었지만, 태어난 후에는 모든 것이 정반대인,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어쨌든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오는 것이 그에겐 좋습니다. 바깥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끝없이 그 안에 숨어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거기가 그의 영원한 거처는 아니니까요.
수행을 하는 도중 때로는 장애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러면 힘이 빠져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또 우리 자신의 업장에
의해 심하게 두들겨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뚝 서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우리는 용감해지고 영웅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매번 상황에 굴복하거나 사소한 장애에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어제 여러분에게 '서유기'를 읽어 주었습니다. 그 책의 첫 부분에 늙은 원숭이, 젊은 원숭이, 영리한 원숭이 등 원숭이 무리들에 대한 묘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젖는 게 두려워 폭포를 넘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 폭포 뒤에 매우 아름다운 동굴, 천국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누구든 들어가 멋지고 편안한 동굴 속에서 살 수 있는데 말이지요. 우리가 어른이면서도 끊임없이 돌파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아기보다 더 나약한 겁니다! 그럼 우리 자존심을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므로 아기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아기들도 정말 용감하니까요!
어떤 빛이든 그냥 보십시오. 알겠습니까? 그 순간에 왜 제대로 깊은 삼매에 들지 않고 ‘내가 어떤 수준에 있지?’라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냥 그것에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지속적인 이로움을 줄 것입니다. 경지가 당신을 돕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바꾸는 게 도움을 주지요. 왜 경지를 알아야 합니까?
사실상 경지 같은 건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건 마음이 ‘좋아. 나는 어떤 것을 얻었다.’ 하고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스승이 “됐다.”라거나 “너는 여기 가서 이걸 갖고, 너는 저기 가서 저걸 가져라.”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밀약을 해줘야 한다고 하는 장삿속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수행자라면 경지에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자신이 신실하고 진보하기 위해, 고귀한 존재, 진실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뿐입니다. 진실하고 선량하며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며 지혜로워져야 하니까요.
우리는 바로 그런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숙제를 더 많이 해낼수록 더 빨리, 더 나은 모습으로 그런 존재가 됩니다. 그렇지요? 그뿐입니다. 경지와 지위는 오직 외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바라는 고향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에겐 어둠보다 나은 빛이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 그것은 이미 여러분의 영혼을 위안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수행을 계속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지, 자만심과 경쟁이 걸린 그런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니 대통령 같은 게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지요. (스승님 웃음)
만약 여러분이 정말 집중하고 수행의 삶에 헌신한다면 자신의 경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곧 있으면, 바로 얼마 후엔 그에 대해 관심이 없어질 겁니다. 그게 최상의 경지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수행을 계속하지요. 마음은 대단히 신실하고 모든 방면에서 발전하지만 어느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성불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최상의 경지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함께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의치 않는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우주에 봉사하도록 신이 어디에 배치하든, 어떤 낮은 경지에 두든, 여러분은 개의치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그건 당신의 느낌일 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기분이 좋았나요?
윤회의 터널을 통과한 겁니다. 그 순간 동안 죽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습니다. 삶으로 돌아왔으니, 이게 바로 진정한 ‘부활’입니다. 좋아요. 문제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도 그 소리를 들은 건가요?
물론이지요. 그게 당신이 죽는 때입니다. 당신은 매일 죽는 거예요. 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지요. 그게 바로 진정한 ‘부활’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만 천사를 만납니다. 그때 천사가 찾아와 높은 세계로 데려가지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일세해탈(一世解脫)’이란 겁니다. 천국은 바로 가까이 있습니다. 이제 성경의 그 말을 알 겁니다.
당신의 형이 당신과 같은 영역에는 있지 않지만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두 사람이 형제로서 통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진동이 형까지 위로 끌어올린 겁니다. 우리가 하는 게 그런 것입니다. 관음법문을 수행하며 진지하게 명상하는 우리는 어디를 가든 보고 생각하는 모든 대상들을 축복합니다.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무형 중생, 천사 등 그 무엇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축복하면서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안 건 우연일 뿐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수준을 끌어올린 바로 그 순간 옆에 있던 형도 축복을 받았던 겁니다. 당신의 형은 그 순간 당신에게 축복을 받은 거예요. 보다 민감해져서 그것을 알아차렸던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가족들 모두도 축복을 받습니다. 단지 그들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다정하게 말씀하시며) 바보로군요. 제때 돌아올 테니 저항하지 마십시오. 그냥 잠시 당신을 데려갔다가 다시 데려오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저항하면 결코 위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해야 해요.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해요. 다시 돌아오기까진 기껏해야 몇 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그렇게 두려워하지요. 그들은 천국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안 돼요. 무서워요. 거긴 아무것도 없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빛이 그들을 위로 데려갈 때 “안 돼요! 아직은 아니에요! 난 아직 성인이 아니에요!” 하고 거부합니다. 내일 죽어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여러분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예, 우리는 늘 스승의 가르침이나 도움에 저항하는 큰 에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진보를 매우 더디게 만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항상 놓을 수 있다면 즉시 성불할 겁니다. 빛이나 소리와 함께 갈 때는 돌아옵니다. 아주 잠시 동안만 죽는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건 당신의 에고입니다. 어떻게 나보다 더 잘 압니까? 당신이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스승은 당신을 데려가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당신의 내면의 스승이 결정하게 두십시오. 왜 따지나요? 스승이 당신에게 있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좋은 일입니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울어야겠군요. 관음법문만 있는 게 아닙니다. 관음법문은 단지 시작점에 불과합니다. 이후 스승은 각 개인에게 맞는 특별한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눈물이나 웃음, 행복, 약간의 양심의 가책 등을 과외로 밀어붙입니다.
상황은 매 순간 바뀌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행복할 수만은 없고, 늘 후회하고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각자에게 주어진 온갖 방법을 통해 매일 진보하는 것을 느낍니다. 관음법문은 완벽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줍니다. 여러분이 가고자 하는 모든 방향으로 인도하며, 여러분의 성장에 필요한 내면과 외면의 온갖 가르침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