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내면의 지혜로써 진리를 인식하자

나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에 오게된 것이 몹시 영광스럽습니다. 유럽을 떠난지 오래되어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를 거의 잊고 있었습니다. 스위스가 얼마나 깨끗하고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조차도 거의 잊었습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다시 한번 이러한 아름다움을 되새겨 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날씨가 이렇게 좋고, 이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있다는 것조차도 잊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산책을 했는데 제네바 근처의 꽃밭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답더군요. 스위스 사람들은 그들의 방문객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진실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두대의 차에는 UN의 임원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말하기를 UN에서 나오는 모든 문서들은 6개국어로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와’하고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들의 기록이 나온다면 아마도 60개국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테니까요. 왜냐하면 전 세계의 많은 제자와 동수들이 있을테니까요.

나는 UN의 초대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초대해 준 UN의 임원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나에게 내가 여행을 싫어하고 꺼리는 것을 극복할 만한 그리고 내 여정에 스위스를 포함시킬 이유와 근거를 주었습니다.

내가 여기에 오게 되었으므로 나는 여러분의 가장 높은 미덕, 여러분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들을 찾는 가장 훌륭하고 빠르며 쉬운 방법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주제가 진, 선, 미 이므로 우리는 이런 미덕에 대해 말해봅시다.

진리는 내면의 지혜를 통해서 감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지적인 것 혹은 글로 가르쳐지는 것을 통해서 얻는 것만이 아닙니다. 경전에서 진리를 소개하는 것은 식당에서 음식을 소개하는 메뉴와 같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진리를 찾은 후에야 우리는 미덕과 아름다움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함양하는 모든 것은 진리를 깨닫고 나서야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을 때, 진리와 합일되어졌을 때, 이외에는 진리를 설명할 아무말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진리의 삶, 아름다움의 삶, 미덕의 삶, 예수의 삶, 부처의 삶, 노자의 삶 등 고대 이래 위대한 스승의 삶을 알게 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감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으로부터의 찬란한 빛을 내면의 지혜로 보게 될 때나 내면의 청각력으로 하늘의 음악을 들을 때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체에 영향을 미쳐도 내부에는 눈도 귀도 없고 내장기관들만 있기 때문에 “우리 내면의 어떠한 부분이 눈과 귀가 있는 거지?”라고 물어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들을 귀나 볼 눈이 필요하지 않은 진정한 우리 자신입니다.

인간은 전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천사들보다 위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덕을 갖추고 깨닫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며 시중드는 천사들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경의를 표하고자 찾아온 천사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내면의 눈, 소위 지혜안이 열린다면 우리는 성자들이 천사를 포함한 많은 존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음의 길을 수행한다면 우리도 여러 계층의 천사들로 둘러싸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신의 왕국이 있고 바로 신 자신이 계십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사람을 그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능한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나 부처같은 성자들은 우리안에 있는 이 위대한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기억하신 분들입니다. 이 힘안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미덕이 있으며 천가지 일과 한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세속적인 활동영역을 초월한 전능한 조직망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므로 어떤일도 인위적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최근에 과학자들도 인간은 여러 다른 의식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잠을 잘 때 다른 차원에 있게 되고, 깊은 잠에 있을 때 또다른 차원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사람은 노력없이도 많은 여러가지를 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차원이 알파, 베타, 델타상태 등이라고 말해진다고 들었습니다. 들어보았습니까? (예) 예! 그래요 고맙습니다!

그러므로 영성과 과학은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게 아니고, 보충하는 관계입니다. 2,600년전 부처께서는 한잔의 물속에 수십억의 생물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물속의 미생물을 찾는 현미경이나 위생학이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자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 생물학이나 화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학자들이 수십년, 때론 수백년에 걸쳐 찾아내는 것을 성자들은 일생에 또한 명상을 하는 몇 시간만에 알아냅니다. 이렇게 성자를 위대하게 하는 요소를 우리 자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찾으려고 노력만 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위대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어떠한 노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방식대로 명상을 수행한다면 아주 쉬운 것입니다.

때로 많은 노력과 고행, 특별한 환경, 아주 특별한 식사를 포함하는 많은 종류의 명상수행법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요기는 명상수행 중 우유만 마시고 견과나 과일만 먹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부작용으로 안좋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수행에서는 아무런 고행도 필요 없습니다. 고기 먹는 것을 금하는 요구사항은 물에서 수영하는 물고기나 이리저리 뛰노는 닭과 토끼들을 보기 위한 자비의 견지에서 입니다.

내가 포모사에 있을 때 내 거주지에 들어 온 한마리 토끼와 닭이 있었습니다. 우리 셋은 서로 사이가 좋았지요. 토끼는 부엌에 들어와서 야채를 훔쳐먹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후 닭이 마른 국수를 먹는 것을 보고는 토끼도 국수를 먹기 시작했지요. 더 이상 야채를 먹지 않았습니다. 닭이 빵을 먹을 때는 그도 빵을 먹었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동물로부터 배울 시간을 낸다면 그들이 놀랄만한 것들을 가르쳐 줍니다. 토끼조차 이리저리 다닙니다. 항상 닭에게 입마추려 하고요. 아마 그는 단지 닭을 기분좋게 하려고 빵과 국수를 먹었습니다. 토끼가 그럴 수 있다면 우리도 물론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가장 사랑하고 우리 마음에 거하시는 주(主)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먹는 습관을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안에 있는 신으로 인해 알게 됩니다.

우리의 지혜는 세상의 모든 학식과 지성의 원천이고 신은 그것이 세속적이든 부성애든 남녀간에든 모든 사랑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찾게 되면 우리는 모든 지성의 힘을 갖게 되고, 이 사랑을 구하면 모든 욕망이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움과 미덕이 우리에게 와서 머물게 됩니다. 애쓰지 않고서도 모든 사랑이 우리안에 채워지고 머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고 지혜이며 아름다움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더 높은 존재계로 올라갈 기회가 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계의 어떤 화장품이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크리스챤 디오르 회사에 이런 말은 하지 마세요.(웃음) 우리가 세상에 살 때는 마치 공원이나 정원, 거리에 꽃을 심듯이 단지 시간을 보내려고 혹은 세계를 아름답게 하려고 화장품을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나는 일반적으로 관광하러 나돌아 다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왔을 때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두루 심어진 꽃들을 보고 즉각 외출했습니다. 난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꽃들을 감상하느라 시간을 뺏겨서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스위스에 살고 있는 것은 정말 행운입니다. 내가 나이 먹고 이빨도 빠지면 여기와서 머무르고 싶습니다. 혹 신의 뜻으로 더 이상 여행할 이유가 없을 때는 여기와 머무르겠습니다.

외적인 아름다움은 꽃, 의복, 화장품, 장식물 등 많은 재료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적인 아름다움은 미덕, 선의 그리고 지혜로써 가꿔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적인 아름다움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 절반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진리, 지혜, 그리고 아름다움의 표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주 거론하고 찾는 평화와 사랑은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의 지혜를 성취한 후에는 더 이상 평화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평화요, 사랑이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 가든, 어디에 살든 우리는 이러한 내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발산할 것입니다. 외양이 어떤지는 상관없습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평화로우며 사랑으로 차 있다는 것을 알테니까요.

그것이 바로 인도나 다른데서 사람들이 소위 스승이라는 분들의 발밑에 꿇어 앉으려고 모여드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승의 내면의 아름다움과 지혜, 사랑 때문이지요. 스승은 세상의 눈으로는 몹시 늙고 주름져서 매력이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매력은 가히 압도적입니다. 우리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하고 무위(無爲)의 기술로써 그것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기술이라고 부르는게 정말로 맞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왕국에는 어떤 기술도 있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각성된 근원을 찾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지혜인 것입니다.

제자가 준비되었을 때, 스승이 도울 수 있습니다. 각자의 요청에 따라 입문시 눌러 주어야 될 내면의 작고 보이지 않는 버튼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마치 ‘열려라 참깨’에서 처럼 모든 것이 열리게 됩니다. 예전에 사람들은 내적인 눈, 지혜안이 열리는 것을 묘사하는 데 여러 비유를 썼습니다. 소망성취의 보석을 다시 찾기, 천국의 문을 열기, 천국의 열쇠 등으로 말입니다.

이제 이곳 스위스에 그 열쇠를 가져왔으므로 쓰고 싶다면 기꺼이 빌려드리겠습니다. 일단 열리면 당신은 즉각적인 깨달음, 깨달음의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마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약간의 경험입니다. 그런 다음 천국의 빛을 보고, 천국을 보게 되며, 신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가르침, UN 처럼 6개국어가 아닌 한개의 언어, 언어 아닌 언어인 천국의 음악을 듣게 됩니다. 침묵 속에서 그것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입문시에 우리는 서로 말을 할 필요없이 조용히 있습니다. 신이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신이야말로 지혜, 사랑 그리고 미덕으로 가득찬 우리의 진아(眞我)입니다. 또한 이런 것들은 인간의 진정한 자질들입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존재로 살아가든지, 성인이 되든지, 신과 분리되든지 하나가 되든지, 우리의 위대함을 모르든지, 우리가 모든 창조물 가운데 최고라는 것을 알든지, 그 선택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변하는 데는 일순간의 시간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즉각적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일단 그 문 밖으로 발을 디디면, 우리는 영원히 향상합니다. 그러나 이 삶과 죽음의 윤회속에 머문다면, 또한 영원히 그 안에 갇힙니다. 천국과 땅은 정말 머리털 하나의 차이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나 모든 충족되지 않는 감정들은 신의 오류나 신의 의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물속에 있고 싶다면 감기가 걸리거나 젖는 것은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변으로 걸어나와 따뜻하고 환영받는 집으로 가고 싶다면 그건 우리의 권리입니다. 이 육체는 단지 일종의 의복과 같고 사실 우리는 옷 위에 또 하나의 옷을 입는 식으로 너무 많은 옷을 입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전혀 유쾌하지가 않습니다. 이 육체의 옷들은 다른 영역으로 올라갈 때는 아무때나 버릴 수 있습니다. 그곳의 영광은 언어로 묘사할 수 없고 생명은 영원하고 행복이 충만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천사나 천국의 그림을 많이 보아 왔어도 그것은 형편없는 모방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천국으로 올라가면 우리는 너무 찬란한 그 영광을 쳐다 보기조차 힘듭니다.

이 세상의 색깔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신의 왕국을 정말로 그려낼 수는 없습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이 세상의 모든 보석들도 높은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높은 왕국에서 다이아몬드는 UFO를 만든다거나 길을 포장하거나 벽을 짓는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곳의 존재들은 스스로 치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위엄스럽고 아름다우며 고결하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보석이나 멋진 옷이나 대저택을 좋아하는 것도 하늘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기억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서로간에 사랑을 구하는 것, 남녀간이나 부모와 자식간이나 친구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도 하늘나라의 진실한 사랑의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우고 싶은 것, 보다 높은 교육을 받고 싶은 것도 우리 지혜에 대한 기억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자가 내면의 진실한 지혜, 진실한 사랑, 진실한 아름다움을 찾게 되면 완전히 만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 현자는 결혼을 했을 수도, 아이와 재산이 있을 수도, 보석이나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것들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쪽이나 똑같이 좋습니다. 그 현자가 두 세개의 박사 학위가 있거나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데, 그것은 그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의 진실한 근원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과 갈망이 불만에서 오는데 그것은 진실한 근원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깨닫고 우리의 위대성을 재발견한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의 범죄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욕심과 소유욕도 이 세상에 내려오기 전에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가졌던 기억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이유들을 비난하지 않고, 우리 자신안에 모든 것이 있다면 것을 앎으로써 또한 우리 동료를 똑같은 의식수준으로 도달하도록 도와주므로써 우리는 우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약 왕자가 정글에서 길을 잃고나서, 아직 왕궁에 도착은 못했어도,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면, 그는 벌써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는 농부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겁니다. 농부들이 그에게 무엇을 준다해도, 그가 받을 수도 안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가 왕국으로 돌아갈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농부들이 아무리 귀한 것을 준다 해도, 왕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깨닫고 자신의 위대성, 내면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재발견했다면, 그는 항상 만족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단점을 수정하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우리의 단점이란 우리의 타고난 권리, 내면의 실제 지위를 갈망하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것 저것을 항시 원하지만 그 생활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서 농부의 집에서는 결코 만족 못하는 왕자와 같습니다. 알다시피 왕자를 즐겁게 하기 힘든다거나, 농부가 충분히 환대를 못한다거나 공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둘 사이의 삶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농부가 최선을 다해 보아도, 왕자를 즐겁게 할 수 없고, 왕자가 대단히 자비롭고 공손하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속여가며 “나는 이 농부의 집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왕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불만스러운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왔던 곳으로 데려다 줄 안내자를 찾을 것입니다. 그 안내자는 고향에 갔다가 다시 온 사람으로 그 길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선생님, 친구, 동료 혹은 무엇이라든 간에 그 사람은 경험자입니다. 이러한 것은 입문에서, 깨달음에서, 지상에서의 우리의 상황에서 있는 것들입니다.

이제 여기 여러분의 나라에 내가 오게 되었으므로, 나는 떠나기 전에 훌륭한 손님이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미덕, 영원한 행복, 영원한 아름다움의 선물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지니면, 당신은 영원히 아름다울 것입니다. 당신은 영원히 현명하고 영원히 고결하고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인간이 갈 길이요, 태고 이래 모든 성자들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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